“실패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인생 최대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다시 일어난 사람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성공의 또 다른 시작이다. 누군가는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고 하지만 시련도, 좌절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스토리가 풍부해지고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에 실패의 역경을 딛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성공한 진주중앙공인중개사무소 조정식 대표. 그를 만나 그의 인생 역전 스토리에 대해 들어보았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성공의 또 다른 시작

어려서부터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조 대표는 군을 제대한 후 첫 직업으로 이용사를 선택했다. 이용사를 하면 평생 밥걱정은 하지 안 해도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으로 이용사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의 또래와는 달리 사회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한 그는 풍부한 사회경험을 바탕으로 30세의 나이에도 진주시 이용사협회의 회장을 맡게 된다. 이 후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진주시 이용사협회를 이끌면서 1976년에는 진주시 이용사 친선체육대회를 주관하여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무 살 때부터 시청을 출입하면서 지역의 어른들과 친분을 쌓았던 부분이 이용사 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이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협회 운영뿐만 아니라 지역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에도 앞장섰다. 진주시 이용사 협회를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즈음, 지인의 소개로 동아식품 총판 대리점을 운영해 보라는 권유로 대리점 총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총판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리던 그는 진주가 아닌 서울에 가서 사업을 확장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서울에 상경한지 만 2년이 채 안되어 그는 전 재산을 몽땅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진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주에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진주에서만 세상 물정을 알았지 서울에서는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실패를 한 뒤 곧바로 진주로 내려오지 못해 당분간은 온 가족이 방 한 칸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후 가족들을 서울에 남겨 둔 채 혼자만 진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진주로 내려온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사업 아이템을 물색하던 중 당시 꽃집이 잘 된다는 것을 알고 진주중앙시장 2층에서 자전거 1대를 가지고 63꽃집을 개업하게 되었다. 원래 천성적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던 그는 자전거 1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88년 문화예술개관과 동시에 문화꽃집이라는 상호로 개업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실패에서 성공, 그리고 또 다른 실패

문화예술회관 개관과 동시에 문화꽃집을 개업 후, 63꽃집을 운영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아 온 것이 밑거름이 됐는지 가게는 잘 운영됐다. 개업당시 지인들의 적극적인 도움도 있었으며 약 20년간 꽃집을 운영했던 기간이 돌이켜보면 좋은 세월이라고 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꽃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일을 했지만 주위의 선후배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게를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제 나이가 42살 때였으니깐 주변 지인들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나이어서 꽃집을 운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었죠. 이와 더불어 진주시 이용사 협회를 하면서 기독양로원이나 경로당, 고아원 등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를 많이 했었는데 그때 인연을 맺었던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용사 협회 시절, 주위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던 그이기에 꽃집 사업으로 발판을 삼아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정치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지방자치가 처음 시작하는 해인 1991년도에 칠암동 시의원 선거에 3명이 출마했는데 2등으로 낙선을 했다. 이후 1994년도에 본선동 시의원으로 다시 출마해서 낙선하고 말았다. “당시 이용사협회 회장을 하면서 쌓아온 인맥도 있었고 바르게살기 진주시협의회에서의 활동과 꽃집을 운영하면서 만난 고객들의 도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사업실패와 두 번의 낙선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이 올 법도 했지만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선거가 끝난 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꽃배달을 다녔을 정도라고 한다.  


 
도전하는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선거에서 낙선을 하고 난 이후 꽃집을 계속 운영을 했던 그는 가게 운영이 예전처럼 잘 되지도 않고 꽃집으로는 남은 여생을 평생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꽃집을 시작할 때와는 달리 꽃집도 많이 생겨 운영도 힘들었고 경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꽃집을 그만두게 되었죠. 그래서 남은 여생동안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을 때 주변 분의 권유로 공인중개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종착지로 공인중개업을 선택한 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조정식 대표. “공인중개업은 무엇보다 중개업무의 경험이 중요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취득하고 인맥을 쌓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고 설명했다. 또 “사무실의 위치는 부동산 전체 시장과 지역별 세부 시장동향을 파악한 다음, 각 분야와 주변 환경에 맞게 자리 잡아야 합니다”고 덧붙였다. 

조정식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진주중앙공인중개사무소는 현재 진주중앙시장 내에 위치해 진주시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 있는 아파트, 재개발, 단독/ 다가구/ 상가 지역 등 각 분야의 특징에 맞게 고개들에게 가장 적합한 맞춤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그는 “공인중개인들이 사무실 선정 시, 사무실이 위치한 곳에 주력상품이 무엇인지, 자신과 잘 맞는지 생각해 봐야 하며, 그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돼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주택지역, 상가지역, 재개발지역, 아파트단지, 농지·토지 등으로 구분해 각 분야별로 심도 깊은 이해와 연구가 필요하며 고객들은 부동산 간판에 컨설팅이나 개발이 아닌 시청이나 군청에 정식으로 등록된 중개업소인 ‘공인중개사 사무소’라는 문구가 있는 곳을 방문해야 하고, 방문해서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필히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20대에 사회전선으로 뛰어들어 수차례의 성공과 실패를 맛보았지만 끝까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조정식 대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과 바르게 살기 진주지회 수석 부회장 등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는 진주시민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사회적으로 어두운 곳을 밝히고 행정적인 지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시민들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한다는 소박한 바람처럼 그의 작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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