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위신을 챙기려다 최악 참사 자초

2000년 8월12일에 일어난 러시아 북해함대 소속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쿠르스크’호의 침몰은 러시아 최대의 참사로 기억되고 있다. 훈련 도중 갑작스런 침몰사고로 118명의 사망자를 낸 쿠르스크호의 사건은 당시 큰 논란이 됐었다. 정확한 원인규명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며 당시 푸틴은 자국 군인들의 생명보다 위신을 챙기려다 최악 참사를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0년 8월12일]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2000년 8월12일 러시아 북해함대 소속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기동훈련 도중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했다. 해저 108m에 가라앉은 잠수함에는 118명이 타고 있었다.
침몰 사실은 서방측이 먼저 공개했고 러시아 군 당국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이를 공식 확인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군은 사고가 나자 쉬쉬하기에 바빴다. 사고 당시 러시아 해군은 쿠르스크함과의 통신이 갑자기 두절되자 곧 조사에 착수했고, 동함의 추진력을 공급하던 2기의 원자로가 중지된 채 해저에 침몰하고 있는 것을 사고 다음날인 13일에서야 확인한 것이다. 러시아 해군은 다음 날 “130여 명의 승조원이 탑승한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함(오스카급)이 바렌츠해에서 충돌한 뒤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보안을 이유로 구조작업에 늑장을 부렸고 서방의 구조 지원도 거절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에 대해 서방의 언론들은 러시아가 118명의 목숨보다 최신 군사 장비의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러시아 해군은 사고 이틀 후에야 모스크바에 있는 해군사령부에 구조작전본부를 설치하고 항모 쿠츠네쵸프를 비롯하여 잠수함구조함, 수상함, 잠수함 등 22척의 함정을 동원 해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심한 비바람과 높은 파도로 작업을 일단 포기했다가 날씨가 좋아지자 15일 밤터 본격적인 승무원 구출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체 능력으로 구조가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나흘 만에 노르웨이와 영국의 심해 구조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8월20일 CNN 방송은 “쿠르스크함은 선체전체가 심하게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으며 러시아 해군 당국도“20일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노르웨이 잠수부들이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잠수함의 앞부분뿐만 아니라 함미와 상갑판도 심한 충격을 받아 파손된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에 따라 승무원들이 생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함 승조원 전원 사망 사실이 확인되자 러시아는‘118명 전원사망’을 공표했다. 미하일 모차크 북해함대 참모장도“가장 큰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며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쿠르스크함의 침몰원인이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졌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에 공식적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조사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측은 쿠르스크호를 침몰시켰을지 모를 서방국과의 진상규명을 거부했다.

사고가 발생한 직후 러시아 해군은 “그동안 러시아 해군의 군사력을 견제하던 서방국가들이 최첨단 비밀 병기를 이용해 쿠르스크호를 제거한 것”이라며 50m떨어진 곳의 잠수함의 파편과 함께 작전을 수행 중이던 해군 정창기 조종사의 목격담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이 “충돌했다면 서방 잠수함도 타격을 입었을 것이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이 없다”며 충돌설에 의문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잠수함과 충돌했을 가능성을 계속 주장했다. 미국은 “8월12일 사고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2회 폭발음을 탐지했다”며 쿠르스크의 자체폭발 또는 폭발물과의 접촉을 시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8월27일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가 군사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쿠르스크함에 2명의 민간인 전문가가 동승, 러시아가 비밀 개발한 신형 어뢰를 실험 중이었으며 발사가 잘못돼 참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타임스는 “실험발사가 잘못돼 인화성이 강한 추진연료에 불이 붙으면서 잠수함에 실려 있던 미사일과 어뢰 탄두들이 폭발했고 이로 인해 어뢰실이 있는 함수 우현에 큰 구멍이 생겨 침수했다”고 묘사했다. 쿠르스크함의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발표되지 않고 있다. 사고가 난 뒤 한 달 후 러시아의회 사고 조사반이 “쿠르스크함이 핵순양함 포트르함이 오발한 어뢰에 맞아 침몰한 것 같다”고 밝혔지만 아직도 러시아의 공식 표명은 없는 상태다. 쿠르스크호는 1994년 건조된 배수량 1만 3,900톤에 길이 154m, 폭 9m의 규모의최신예 핵잠수함으로 최대 24기의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에서 120일 간이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1997년 8월6일]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1997년 8월5일 오후8시22분 승객 231명, 승무원 23명을 태운 대한항공 801편이 김포국제공항을 이륙했다. 그리고 6일 승객과 승무원 등 254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휴양지 괌의 아가냐공항에 착륙하다 니미츠힐 밀림지대에 추락했다. 추락 당시 801편의 왼쪽 날개의 랜딩 기어가 나무와송유관을 치면서 왼쪽 날개 엔진이 언덕과 충돌했고 이후 기체는 언덕을 올라가면서 기수 부분부터 부러지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에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시설의 작동이 중단되고 최저안전고도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상태에서 조종사가 육안에 의존해 착륙하려다 이 같은 참사가 빚어졌다. 사고 30분 전 박용철 기장은 착륙 전에 실시해야 하는 착륙 브리핑 당시 니미츠 VOR/DME(전방향 무선표지소)가 활주로에서 3.3항공마일 떨어져 있다는 사실과 활주로까지 안전하게 강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인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통보 받았다. 이 사고로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목숨을 건졌으나 휴가철이어서 대부분 신혼부부나 일가족 참사가 많았다.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착륙인 줄 알았다고 말했으며 비행기 충돌 후 화재가 발행했고 진술했다. 구조는 사고 1시간이 지나서야 시작 됐고 구조는 괌 소방서와 미군이 함께 진행 했으나 당시 화재가 심해서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시신도 많았다. 블랙박스를 해독한 NTSB(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는 기장의 착륙 전 브리핑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고 이것이 부기장과 항공 기관사가 자신의 역할은 물론이고 기장에 대한 상호 확인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1969년 8월8일] 무용가 최승희 영원히 잠들다
광복 후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하던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8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58년 그녀의 남편 안막(安漠)이 김일성에게 반역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뒤 부르주아적 잔재를 가진 예술가로 탄압을 받았고 최승희는 중국으로 도망하다 국경수비대에 사살됐다는 설이 있다. 또 격리수용되다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지하철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숨졌다는 설도 있다.

 

1911년 11월24일 경성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무용 발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무용계에 입문했다. 최승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하고 경성방송국 연예 분야를 담당하던 오빠 최승일의 후원을 받아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으로 지원, 일본에 건너간다. 이시이의 제자가 되어 일본에서 사사한 뒤 무용단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공연을 펼친 최승희는 1929년 서울로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잇따라 신작 발표회를 가졌다. 그녀는 전통무용을 익혀 자신의 창작무용에 응용,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했다. 특히 일본에서 공연한 <에헤야 노아라>가 대성황을 이루어 점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녀는 1938년~1941년 전 세계를 무대로 한국 춤의 아름다움을 알리며‘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라 불린다. 1938년 개최된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요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해 광복 후 친일파라는 오명에 시달리게 되자 문인인 남편 안막과 월북, 1946년 평양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남편의 숙청 후 그녀 역시 1967년 숙청을 당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 복권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작품으로 <인도인의 비애>, <초립동>, <장구춤>, <거친 들판에 가다>, <승무>, <칼춤>, <반야월성곡>, <춘향전>, <유격대의 아들>, <조선의 어머니> 등이 있다. 무용 이론 연구에도 매진해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65년 8월11일] 미국 와츠(Watts)폭동
1965년 8월11일 오후 7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흑인거주 지역 와츠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난다. 경찰의 과잉단속이 기폭제가 됐다. 사건발단은 백인 경찰이 마케트 프라이(Marquette Frye) 흑인 형제를 음주운전 혐의로 조사하다 이들을 곤봉으로 때려 체포했고 이들의 어머니가 항의하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군중들이 흥분하며 돌을 집어던졌다.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합세한 흑인 시위는 곧바로 방화와 약탈, 살인까지 저지르는 유혈폭동으로 번졌다. 경찰 3,000여 명의 지원병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섭씨 35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흑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들은 특히 이 지역의 상권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을 집중 공격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진압에 나섰지만 흑인 만 명 이상이 가세한 와츠폭동은 6일 동안 계속됐다. 흑인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백인과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폭동이 더없이 거세지자 14일 주지사는 계엄령에 준하는 ‘폭동사태’를 선언, 와츠 지역을 봉쇄하고 주 방위군 1만 4,000명을 투입하고서야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6일간의 폭동이 휩쓴 이 지역은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로 변했다. 무려 사망자 34명(흑인 25명), 부상자 1,030명에 체포된 인원은 4,000명에 달했다. 불탄 건물만 600여 채. 재산피해는 1억 7,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년 8월18일 오전 10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그리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돌아오지 않는 다리’남쪽국제연합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수십 명이 나타나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t) 미군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북한의김일성 주석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국제연합군 측에 전달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사건이 발생한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또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쌍방이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으며 경계 밖 상대편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고 콘크리트 단으로 경계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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