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응원단장에서 MC로 그리고 다시 인기강사로 살다

[시사매거진 242호=이관우] 1989년 MBC TV <우정의 무대>는 군인을 대상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그리운 어머니’ 주제곡은 객석에 도열한 육·해·공·특 장병은 물론 TV 앞에 앉은 시청자에 이르기까지 가슴 찡한 감동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정점에는 장교 출신이며 고려대 응원단장 출신인 뽀빠이 이상용 MC가 있다. 유쾌·상쾌·통쾌함을 선사함은 물론 훈련병에서 고참 병장까지, 그리고 병들에게 있어 하늘과 같은 중령, 대령, 그리고 별을 단 사단장 등을 소환해 무대에 세우는 핵폭탄급 파워를 장착해 큰 웃음을 주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누명과 오해로 방송에서 하차한 후 질곡의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강사로 등극하며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속에 날마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기도는 불굴의 의지를 일깨워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런 뽀빠이 이상용을 수서동 오피스텔에서 만나 보았다.

지난 5월 중순, 스승에 대한 감사와 어린이·어버이가 함께하는 가정의 달을 맞아 수서동에 위치한 뽀빠이 이상용 명강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건강한 웃음과 더불어 친근한 악수를 청하는 이상용 명강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탁자에 놓인 스케줄 표를 보여준다.

“이 스케줄이 보이는가? 꽉 짜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마침 선거철이라 지자체 군수와 시장 등을 만나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곧 나가야 하니 서로 속도감 있게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2시간 이상 이어진 인터뷰 내내 유쾌한 웃음은 물론 유익한 정보까지 제공하는 그는 필자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었다.

미숙아 이상용, 고려대 바디빌더 응원단장 되다

1944년 4월,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미숙아로서 가족에 의해 유기될 번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부친은 시국이 하수상해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백두산으로 피신을 갔다. 그런 아버지를 찾아 10개월간 임산부의 몸으로 걸어서 백두산을 다녀온 어머니는 극심한 궁핍과 굶주림으로 아사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겨우 돼지우리에서 나온 음식찌꺼기가 훌륭한 음식이었을 정도로 주린 배를 채운 어머니는 고향에 돌아와 해산을 했다.

“막 태어난 나는 영양결핍으로 아주 작고 병색이 완연한 갓난아이였다.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외삼촌들이 흙 속에 파묻었는데 마침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던 6살짜리 이모가 필사적으로 날 구출해 산으로 도망갔다. 갓 태어난 내가 물 한 모금, 젖 한 모금 안 먹고도 이틀 간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이모의 의지가 너무도 완고하여 결국 가족은 다시 나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상용은 성장이 매우 더뎌 6살 때까지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병치레가 잦고 약골인 그는 12세까지도 성인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 ‘이대로 놔두면 죽는다’는 부친의 판단 하에 아령운동을 시작했고, 7년이 지나 대전고에 진학했을 때는 보디빌딩으로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을 수상했다. 이어 고려대 임학과에 진학한 이상용은 대학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한 후 ‘미스터 고대’를 비롯해 응원단장으로 맹활약을 한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권유로 아령을 들고 체력을 연마한 나는 60년 동안 뽀빠이 팔을 만들고 가꾸었다. 지금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또한 오후 10시에 잠이 들어 5시간 동안 잠을 잔다. 이 생활패턴을 30년 넘게 지켜오고 있다. 특히 내게 있어 아버지의 기억은 유산으로 21,000원 남겨주신 것이다. 마이너스 통장 안 남기려고 그렇게 고생하시고, 악착같이 사셨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가장인 남자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 그래서 나 역시 내 세대의 가난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다.”

뽀빠이 이상용, 방송계에서 전성시대 맞다

이후 ‘학생군사교육단(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이하 ROTC)에 들어간 이상용은 기갑으로 전차소대장(장교)으로 복무했다. 전역한 다음 영업·판매를 하다가 CBS 기독교방송국에 채용된다. 이어 29세가 되던 1973년경에는 친분을 맺고 있던 변웅전 아나운서의 소개로 MBC TV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과거 고려대 응원단장으로 활동하던 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듬해인 1974년 KBS 라디오 ‘위문열차’에, 1975년 MBC TV ‘모이자 노래하자’에 ‘뽀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방송 진행을 맡게 된다. 그리고 1978년 삼양라면 CF와 더불어 1987년에는 뽀빠이 농심 알통콘을 광고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무엇보다 1988년 MBC TV <우정의 무대>는 뽀빠이 이상용의 인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최고 전성기였다. 어린이들의 친구인 뽀빠이에서 군인들의 큰형님인 뽀빠이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이상용은 병약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무려 82억 원의 자비를 들여 567명의 심장병 어린이를 수술하는 데 물심양면 지원해 주었다. 그러한 자세와 선행으로 인해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90년 체육훈장 기린장을, 그리고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런 그는 1부터 10까지 ‘뽀빠이 십계명’을 만들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1. 일일이 따지지 마라, 2. 이유를 달지 마라, 3. 삼삼하게 일하라, 4. 사정없이 뛰어라, 5. 오 땡큐를 자주하라, 6. 육갑 떨지 말라, 7. 칠십 퍼센트(%)만 만족해라, 8. 팔팔 뛰면서 살아라, 9. 구구한 변명하지 말라, 10. 십 퍼센트만 사회에 환원하라.’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정계에 입문할 것을 권유 받은 동시에 정중히 고사하자 누군가의 모함으로 ‘심장병 어린이 돕기 공금횡령’ 죄에 연류 돼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후 ‘누명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동안 쌓아올린 그의 명성과 명예에는 큰 생채기를 안고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추락한 이상용, 고통의 시간 미국에서 재기하다

그때 이 시대의 현자인 법정스님이 “뽀빠이 이상용, 자네 어디로든 이 땅을 떠나시게”라고 권했다. 교계의 대부인 김수환 추기경도 “눈이 왔구나. 빗자루로 쓸어내려 하지 마라.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은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한 두 선사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단돈 4만원만 소지한 채 미국으로 떠난다.

“아내에게 생활비로 단돈 200만 원을 건네주고 미국으로 가서 친구 집 문간방에 살았다. 거기서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며 돈을 벌었다.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뽀빠이가 착한 일 하고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결국 한국사회가 우리의 우상을 죽였다’고 방송을 했다. 나의 선의를 알아주니 매우 고마웠다. 그에 힘입어 나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버스회사 대표인 내 고대 후배역시 ‘형 우리 다 알아’라고 위로해 주었다.”

뽀빠이 이상용은 2년간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다. 하루 14시간 넘도록 버스를 옮겨 타가며 가이드 했다. 개중 후배가 “우리 버스에 고대 출신 하나가 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미국에 왔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우정의 무대’처럼 나서서 팁이라고 보태 줍시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와~” 성원하며 모자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씩 꽂아 주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상용은 전남 출신인 신문사 기자 후배의 도움으로 29.7m2(9평) 남짓한 좁은 평수의 아파트를 임대받게 된다. 비록 출입문이 좁아 침대가 안 들어가는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꿋꿋이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이어 고대 출신 OO은행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6억 원을 신용 대출해 주었다. 그의 가족이 66.115m2(20평) 아파트로 이주하게 도와 준 것이다. 뽀빠이 이상용은 “16년 동안 대출금 6억 원과 이자 3억 5000만 원을 모두 갚는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올해로 27년째 그곳에 살고 있다.

MBC TV '사람이 좋다'로 돌아온 이상용은 인기 강사다

지난 2018년 5월1일 MBC TV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뽀빠이 이상용의 2막 인생이 방송 되었다. 자신보다 1살 연상이며 뽀빠이의 여자 친구 ‘올리브’와 똑 닮은 아내 윤혜영 씨를 고향 누나의 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을 했다. 인생의 파란과 풍파를 겪으며 기도하는 삶으로 다정히 살아가는 이들 부부의 일상이 담담하게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잊고 있던 뽀빠이 이상용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뽀빠이가 늘 명랑해서 그렇게 고생할 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이상용은 “그동안 성당을 다니면서 늘 기도를 하는데, 나의 기도는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게 해주시고, 부유해도 건방지지 않게 해주시고, 친구가 다 떠나도 외롭지 않게 해주시고, 억울한 일 당해도 욱하는 성질 내지 않게 해주시고, 손실이 있어도 애달파하지 않게 해주시고, 오늘 아침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살았고, 행복하게 살았고, 사랑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덧붙인다.

2007년 MBC ‘유쾌한 청백전’을 담당했던 PD가 춘천MBC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뽀빠이 이상용을 요청하며 1시간짜리 <매거진>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겼다. 주변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상용은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두둔하며 일축했다. 이로써 하차 후 3년 만에 이상용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전MBC에서 ‘주부가요열창’을 맡겼다. 뿐만 아니라 기업체에서도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뽀빠이 이상용은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보다 열심히 ‘뽀빠이 아이디어 노트’를 작성하고 있다. 일상생활 속에 일어나는 온갖 에피소드를 메모하며 강연 때마다 신선한 웃음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면 재미있는 사연을 모아 책도 한 권 출판할 예정이란다. 아울러 그때에는 25인승 버스 한 대를 사서 시골로 다니며 ‘뽀빠이 유랑극단’ 공연도 전개할 생각이란다. “뽀빠이와 함께 고향을 간다(방문한다)는 취지에서 미녀단, 악단, 의료봉사단을 꾸리고 전국을 여행하며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지난했던 삶의 철학은 벌교에서 만난 107세 노인의 한 마디로 정리된다. 방송을 통해 “끝으로 시청자에게 한 마디 하시라”고 권했더니 “냅뒀더니 다 뒤지데”라고 했더란다. 뽀빠이 이상용 역시 살아오며 억울하고 괴로운 시간이 있었지만 노인의 말처럼 그냥 두면 모두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 믿으며 살고 있단다. 그는 이천도자기축제 사회를 보고 난 후 감사의 뜻으로 받은 도자기에 ‘남들이 씹더라도 냅둬라. 씹다가 죽더라’라고 써서 보관하고 있다. 해학적 표현으로 파란의 시간을 이겨내려는 의지의 소산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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