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주민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관중몰이 성공 거둬

지난 6월22일 원주 치악체육관은 로드FC(정문홍 대표) 12회 대회 관람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기 개막 예정시간은 오후6시. 하지만 관중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기시작 두 시간 전부터 치악체육관에 운집했다. 친구, 연인, 가족 단위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시합 이야기로 무료함을 달랬다. 이 같은 열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스텝들은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관중들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선수들은 매 경기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연출했다. 


이번 대회는 지방에서 열렸음에도 관중몰이에 성공했다. 이는 지역민들의 애정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 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 대부분은 원주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은 영건스8 경기 때부터 열렬히 환호했고 특히 원주 소속 선수들이 입장할 때면 엄청난 환호성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원창묵 원주시장, 채병두 원주시의장도 경기장을 찾아 로드FC를 빛냈다. 로드FC 부회장인 가수 박상민 씨, 강남 팀포스 소속 배우인 이훈 씨, 개그맨 이승윤 씨 등 연예인들이 선수들과 호흡했고 가수 NS운지는 축하공연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번 로드FC 12회 대회는 원주 시민들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이번 대회의 매치업은 개막 전부터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일본의 판크라스, 딥, CMA, 글래디에이터, 홍콩의 LFC 등 해외 유명클럽 소속 챔피언 타이틀 보유자 6명이 경기에 나선데다 전·현 챔피언의 경기가 4경기나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홍콩 LFC 소속이며 전 웰터급 챔피언 배명호 선수와 브라질 출신 앤드류스 나카하라의 경기, 그리고 ‘인간승리 파이터’ 이길우와 ‘왕따 파이터’ 송민종의 경기는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였다. 팬들의 관심을 증폭시킨 경기는 또 있다. 국내최초로 펼쳐진 여자 파이터들의 대결이었다. 그 주인공은 셀리나 하가와 요시다 마사코. 특히 셀리나 하가는 ‘헬보이’ 요아킴 한센의 여자친구이자 한국계 입양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울버린 vs 코리안 킬러’, 불꽃 튀는 접전

‘울버린’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배명호는 그동안 대부분의 경기를 해외에서 치렀다. 그가 데뷔했던 시기는 지난 2006년. 데뷔 초에는 다소 부진했으나 이후 6연승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2011년엔 홍콩 LEGEND FC 웰터급 챔피언에 오른데 이어 최근 5연승을 달리며 승승장구했다. 그에게 이번 로드FC 12회 대회는 5년 만의 국내 복귀전이자 고별전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군 입대를 미뤄왔다. 하지만 더 이상 해외출국이 어려웠고 이에 국내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군 입대 전 의미 있는 경기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다”라면서 “적어도 이번만큼은 승리를 넘어 감동을 안겨줄 만한 명승부를 펼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의 상대는 브라질의 앤드류스 나카하라였다. 그의 전적은 4승 2패. 이 선수는 일본에서 수많은 한국 선수를 상대로 잇달아 승리를 거두며 ‘코리안 킬러’라는 별명까지 얻은 선수였다. 그는 또 K-1의 전설 필리오에게서 가라데를 전수 받았고 UFC 미들급 강자 비토 벨포트를 사사하기도 한 강호이기도 했다.

두 선수는 서로 승리를 자신했다. 빅 매치를 의식한 듯 두 선수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배명호와 나카하라는 경기를 하루 앞둔 21일 원주시 따뚜 공연장에서 열린 ‘로드FC 12’ 공개계체량에서 각각 77.25kg, 77.30kg을 기록하며 계체를 마쳤다. 이때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카하라에 이어 계체를 마친 배명호가 과감한 포즈로 나카하라를 도발한 것이다. 이러자 나카하라는 배명호의 턱을 향해 주먹을 올린 상태에서 강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 순간 장내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선수의 신경전은 케이지에 그대로 옮겨졌다. 두 선수는 그야말로 불꽃 튀는 접전을 펼쳤다. 배명호는 2라운드까지 우세를 보이며 경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나카하라도 만만치 않았다. 나카하라는 3라운드 후반 니킥과 뒤돌려 차기에 이은 오른손 펀치를 배명호에게 작렬시켰다. 배명호는 상대에게 역습을 허용하며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만약 시간이 조금 더 남았더라면 더욱 위험한 상황에 몰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는 파이팅 넘치는 경기로 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한동안 펀치로 치고 들어간 뒤 테이크 다운을 시도하는 그라운드 앤 파운드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과감한 정면돌파로 승부수를 던졌다. 나카하라는 배명호의 파이팅에 말려 자신이 원한대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했다. 결국 두 선수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배명호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맞붙은 선수 중 최고로 강했다. 특히 킥이 엄청났다”고 말한 뒤 “3라운드 후반에 크게 밀린 것이 판정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나카하라 역시 “1라운드는 비슷했고 2라운드는 배명호가 우세했으며 3라운드는 내가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니킥과 뒤돌려 차기로 강한 데미지를 입혔다. 피니쉬에 근접한 상태였으므로 승리를 예상했다”는 심경을 밝혔다. 

 인간승리 파이터 vs 왕따 파이터, 인간승리로 결말

이번 대회의 백미는 이길우와 송민종의 벤텀급 토너먼트 결승경기였다. 이 경기는 현 챔피언 강경호의 UFC 입성으로 인해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는 중요한 경기였다.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또 있었다. 이길우는 ‘인간승리 파이터’라는 별명을, 송민종은 ‘왕따 파이터’라는 별명을 각각 갖고 있었다. 그런데 두 선수의 별명엔 남다른 사연이 서려 있었다. 

이길우는 첫 돌 전부터 후두에 혹이 생겨 태어나자마자 생사를 넘나들었고 수술대에만 25차례 올라야 했다. 호흡이 가장 중요한 격투기 선수에겐 치명적 약점이었다. 하지만 이길우는 피나는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다. 송민종의 사연도 가슴 뭉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송민종은 학창 시절 학교폭력에 시달렸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무런 이유 없이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아픔을 격투기로 승화시켰다. 전문가들은 그가 천부적인 레슬링 실력을 갖춘데다 순간적인 포지션 장악 능력도 뛰어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픔과 고충을 뛰어넘은 두 선수의 대결은 팬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두 선수의 대결은 예상대로 치열하게 펼쳐졌다. 두 선수는 경기 초반 잠시 동안 탐색전을 벌이다 중반부터 소나기 펀치를 주고받았다. 상대가 조금만 틈을 보여도 전광석화도 같은 공격이 들어오는 양상이었다. 1라운드가 타격전이었다면 2라운드는 그라운드 싸움으로 전개됐다. 두 선수가 계속 포지션을 바꾸면서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3라운드에선 송민종이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송민종은 계속해서 펀치를 날리며 상대를 코너에 몰아 붙였다. 경기 막판엔 등 뒤에서 조르기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길우 역시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넘치는 투지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결과는 이길우의 판정승이었다. 1, 2라운드에서 착실히 포인트를 따낸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목이 좋지 않다. 목소리가 듣기 좋지 않아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며 “20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영전에 챔피언 벨트를 바치고 싶었다. 3라운드는 목의 혹 때문에 호흡이 가빴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며 버텼다”는 소감을 밝혔다. 비록 경기에서 패했지만 관중들은 송민종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송민종은 경기 소감에서 “멋진 경기를 펼쳐준 이길우에게 감사한다. 축하한다”고 말한 뒤 “이길우가 나보다 열심히 해서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더 열심히 해서 다시 챔피언에 도전하겠다”며 이길우와의 재대결 의사를 드러냈다. 


뿌리를 찾기 위해 케이지에 오르다 

로드FC 12회 대회의 또 다른 관심사는 국내 최초로 펼쳐지는 여성부 경기였다. 경기에 임한 셀리나 하가와 요시다 마사코 선수는 남성 못지않은 파이팅으로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선보였다. 경기 주도권은 셀리나 하가가 쥐었다. 

셀리나는 1라운드 초반 테이크 다운을 성공시키면서 손쉽게 경기를 풀어 나갔다. 요시다는 러버가드로 셀리나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셀리나는 노련하게 요시다의 방어를 피해 마운트를 점유했다. 셀리나는 이후 백포지션으로 전환해 리어 네이키드 초크(상대의 등 뒤에서 팔로 목을 감아 조르는 기술)를 시도했다. 요시다는 그라운드 기술 스페셜리스트인 셀리나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경기는 1라운드 4분 2초 만에 셀리나 하가의 서브미션 승리로 끝났다. 그녀는 이번 승리로 로드FC 최초로 여성부 경기 승리자로 기록되는 영광도 함께 안았다. 그녀는 경기 직후 “너무나 행복하고 떨려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며 “앞으로 로드FC에서 더 싸우고 싶다. 많은 응원 부탁한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셀리나 하가의 경기는 여러모로 의미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부모의 나라인 한국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부 경기를 펼쳤다는 점은 의미가 남달랐다. 그녀는 출생 후 6주 만에 노르웨이 가정에 입양됐다.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남자친구인 ‘헬보이’ 요아킴 한센과 함께 한국을 찾으면서 조국에 대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난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면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기분은 정말 묘했다”는 심경을 밝혔다. 그러다가 한국을 찾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녀의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DNA도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난 3월 로드FC 11회 대회에 출전한 요아킴 한센과 함께 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때 그녀는 한국 음식에 완전히 매료됐다. 한국 음식을 너무 즐긴 나머지 몸무게가 1.5kg 불기까지 했다. 그녀는 당시 “DNA에 각인된 ‘무엇’ 때문에 일수도 있지만 솔직히 한국 음식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이번 경기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뿌리’를 찾기 위한 간절한 열망이 그녀를 케이지에 오르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친부모가 경기를 보고 자신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항상 친부모님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왜 노르웨이란 나라에 나를 입양시켰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점이 많다”는 소감을 밝혔다. 

로드FC는 회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경기력과 치밀한 대회 운영으로 아시아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마저 넘보고 있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한국 토종 종합격투기의 젖줄인 원주에서 열려 원주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지식인 자크 엘룰은 현대 지성인의 행동강령을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했다. 이번 로드FC 대회는 이런 강령을 인식시킨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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