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39호=오병주 칼럼위원) 황남대총은 신라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금제유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특이한 유물이 있다.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그것은 유리였다.
황남대총에서 찾아낸 유리의 뿌리와 고대문화의 비밀을 밝힌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는 모두 10점.
남자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출토 된 유리컵에는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었다.
유리는 당시 신라에서 생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가지고 있었더라도 세공할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유리 유물들, 그 대부분은 외래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고대 신라인들이 유리를 어디에서 수입한 것일까?

경주 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유리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작은 유리구슬에는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 숨어 있다. 하얀 얼굴에 눈이 크고, 입술을 붉게 칠한 사람의 얼굴, 구슬 안에는 모두 네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목걸이를 통해 유리 산지를 추적할 수 있다.

꽃이 만발한 나무 위로 희 새가 날고 있고 그 아래 짙게 화장한 낯선 이들이 보인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정교한 그림이 겨우 1.5㎝밖에 되지 않는 유리구슬에 그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그냥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의 가는 유리막대를 일일이 오려 붙여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신라는 그 반대편, 동쪽의 끝에 있다.
이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로마에서 유행하던 유리병이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그 전파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로마에서 유리가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미 신라시대 이전 한나라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하여 인도와 동남아의 구슬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유리가 신라로 전해지기 훨씬 전인 한나라 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해 세계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것이다.
2000년 전, 한반도는 세계를 향해 한껏 열려 있던 국제사회였던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