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로 얼룩진 채 조인된 한일협정,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촉진하는 계기 마련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절정을 이룬 1964년 6월3일, 역사에 6.3사태로 기록된 대대적인 시위진압 사건이 일어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만 5,000여 명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이자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학생들과 종교인 문인 교수 등의 민주인사와 야당까지 가세하여 연일 시위가 계속되자 박 정권은 같은 해 7월29일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대학 휴교와 언론, 출판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 체포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64년 6월3일] 6.3사태, 서울 비상계엄령 선포

그해 3월24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3월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19일 전후해 학생시위는 다시 일어난다. 각지의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해 한일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김종필에 대한 규탄성명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을 열었다. 그리고 6월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 2,000명의 학생들은 도처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대학생 7,000~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몇몇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박정희, 김종필, 민생고 화형식과 일본 수상 이케다(지전)의 화형식, 그리고 오일육 피고에 대한 모의재판을 열고 박정희 정권을 성토했다. 6월3일 오후 4시 경,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교문을 나섰고 도보 이동 중 지친 학생들은 들것에 태우고 시위에 돌입했는데 맨 앞의 들것에는 송철원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데모 학생들과 연도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중앙청 앞에 도착했으나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밀려 학교로 철수하고 말았다. 윤보선은 이를 마치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고 묘사했다. 이 시위는 6.3사태를 일으킨 시위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이던 법대 학생회장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 이경우(법대), 박정훈(정경대), 이명박(상대) 등의 주도하에 연세대·서울대생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만 5,000여 명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학생들의 데모가 더욱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6월3일 밤 9시40분에 선포하기로 한 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해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한다.박정희 정부는 같은 해 7월29일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대학 휴교와 언론·출판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 체포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과 언론인 등 348명이 구속됐다. 한일국교 수립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은 6.3사태가 일어난 지 1년 만인 1965년 6월22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조인한다. 시위로 얼룩진 채 조인된 한일협정은 현재까지도 한일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1926년 6월10일] 6.10 만세운동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 융희(隆熙)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된 1926년 6월10일.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이 운구행렬이 지나는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 박하균(朴河鈞),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천도교의 박내원(朴來源), 권동진(權東鎭), 양재식(楊在植), 손재기(孫在基), 박내홍(朴來弘), 백명천(白明天), YMCA의 박두종(朴斗鍾),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 이광호(李光鎬), 이황희(李晃熙), 사회주의 측의 권오설(權五卨), 김단야(金丹冶), 이지탁(李智鐸), 박민영(朴民英), 인쇄직공으로 민창식(閔昌植), 이용재(李用宰), 김항준(金恒俊) 등이었다. 권오설은 자금을 조달하였고, 박내원은 전단지 살포와 연락을 담당하였다. 양재식, 이용재, 백명천 등은 안국동 감고당(感古堂) 민창식의 집에서 10만 매의 전단지를 인쇄하였고, 태극기도 준비했다.

이들은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을지로, 관수교, 황금정 3정목(3가), 훈련원, 동대문 동묘(東廟), 청량리에서도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이에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병인(丙寅)만세운동이라고도 하는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시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황제 국장일을 거사일로 택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에만도 경찰과 군인 7,000여 명을 동원해 진압했다. 6.10만세사건으로 이날 하루 학생 1,000여 명이 체포됐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박내원, 민창식 등은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呂運亨)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이병립, 박하균 등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동모자 또는 관련자로 체포, 투옥되었다.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만큼 전국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우리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이었다. 


[1955년 6월11일] 프랑스 자동차경주 사고, 80여 명 사망

프랑스 파리 남서쪽으로 215㎞ 떨어진 도시 르망에서 펼쳐진 ‘르망 24시간 레이스’. 당시 세계 스포츠카 선수권 대회의 4전으로 프랑스의 샤르트 서킷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경기를 시작한 지 3시간 조금 지나 비운의 사고가 난다. 40살의 프랑스 레이서인 피에르 레베(Pierre Levegh)가 몰던 메르세데스벤츠가 차 한대를 들이받은 뒤 흙벽을 들이받은 것. 곧바로 차가 산산조각나면서 엔진과 부서진 차체가 관중석을 덮쳤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300SLR이 관중석에서 폭발하고 레이서와 관객 80여 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사고차량과 같은 종류인 다른 두 대의 메르세데스벤츠가 퇴장한 채 경주는 계속됐다. 경기를 중지할 경우 관중의 동요로 앰뷸런스 진출입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결국 숨진 레베가 사고 직전 추격했던 영국 선수 마이크 호오손(Mike Hawthorn)이 우승을 차지한다. 

모터스포츠 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르망 레이스는 바로 이 사고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고 이후 메르세데스벤츠는 1987년까지 32년 동안 자동차경주에 출전하지 않았다. 이후로 스위스에서는 자동차 경주가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다.


[2000년 6월13일]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13일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 만나 손을 맞잡은 역사적인 날을 맞이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측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에 갔다. 김 위원장이 순안공항으로 나와 직접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영접했다. 두 정상은 2박3일 동안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정착,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 간 교류와 협력 등 광범위한 사안을 논의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의 성과물로 이른바 ‘6.15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남·북한의 두 정상이 전날 오후 백화원 영빈관에서 3시간 50분에 걸친 마라톤회담에 합의한 5개항을 담은 선언문이다. 두 정상은 이 선언문에서 남과 북이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 그리고 사회·문화·체육 등 여러 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다짐했다. 

6.15공동선언문은 남북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8·15 광복절에 즈음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을 골자로 한 것으로써 남과 북의 냉전과 대결 구도 종식, 그리고 화해, 협력의 역사적인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1968년 6월5일] 로버트 케네디 피격

1968년 6월5일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LA에 있는 엠배서더호텔에서 피격됐다. 캘리포니아주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자축 연설을 하고 나오는 순간 로버트 케네디는 머리에 총탄 4발을 맞고 쓰러진다. 저격범은 요르단계 이민자. 

케네디가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됐던 그는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형인 존.F.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4년5개월 만에 암살당해 형의 비극적 전철을 밟았다. 그의 나이 마흔세살, 그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형 옆에 묻혔다. 하지만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에 변호사가 됐다. 1960년에는 형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관장했다. 이후 법무부 장관과 상원의원을 지냈다.

미국의 ‘정치 가문’으로 미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케네디가문은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 이후로 1명의 대통령, 3명의 대통령 후보, 3명의 상원의원, 2명의 하원의원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후손 중 8명이 사망하는 등 잇따른 비운을 겪었다.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7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당시 이 사고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 총 1,445명이 피해를 입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그리고 옥상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설계 시 대단지 상가로 설계되었던 것이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되어 1989년 완공됐다. 그 후에도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부터 균열 등 붕괴 조짐이 있었다. 1995년 4월경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경부터는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화점 측은 응급조치로만 대응했다. 그러다 1995년 6월29일 오전 5층에서 심각한 붕괴 조짐이 나타났지만 당시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기로 결정했고 우려했던 참사가 벌여졌다. 결국 오후 5시 57분, 5층 바닥의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지며 그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건물 붕괴는 시작되었다. 오후 6시 직전에 5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20초 만에 모든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건물은 지하 4층까지 완전하게 매몰되었으며, 안에 있던 1,500여 명의 사람들은 잔해 속에 묻히게 되었다. 재산 피해액은 2,700여 억으로 추정되었고 전 삼풍그룹 회장 이준(1922~2003)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해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는 등 백화점 관계자와 공무원 등 25명이 기소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피해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는 지어진 지 6년 만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는 설계와 시공, 감리의 부실, 그리고 행정기관의 감독 소홀 등 총체적인 부실이 빚은 사고로 조사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가 실시되었고 긴급구조구난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부산·광주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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