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대응으로 피해 확대…340명의 사상자 발생

15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참상은 잊을 수가 없다. 대구지하철 대곡역에서 안심역 방향으로 운행하던 1079호 열차안에서 시작된 불길은 화마가 되어 순식간에 대구지하철을 덮쳤고 이로 인해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했다. (출처_뉴시스)

(시사매거진238호=신혜영 기자)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53분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을 지나던 열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불은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렸고 이로 인해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당일 9시 53분 12초경 대한민국의 하늘이 슬픔에 잠겼다. 15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참상은 잊을 수가 없다. 대구지하철 대곡역에서 안심역 방향으로 운행하던 1079호 열차안에서 시작된 불길은 화마가 되어 순식간에 대구지하철을 덮쳤다.

지하철 내에 탑승하고 있는 김대한(당시 56세)은 사건 당일 1079호 열차의 첫 번째 칸 경로석에 앉아 있다가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고 있을 때 라이터와 페트병 2개에 나눠 담은 휘발유 2리터로 불을 질렀다. 당시 주위의 승객들이 그를 제지했으나 이미 불이 붙은 페트병을 그대로 내던졌다. 제1079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중이어서 기관사를 비롯해 승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이 열차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열차의 불길이 제1080열차로 옮겨 붙으면서 참극이 시작됐다. 당시 1079 기관사가 지하철 사령에 화재 사실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고 사령은 호재 경보가 울리고 있는데도 무시한 채 운행 중지 조치 등을 취하지 않았다. 그 사이 1079열차의 불길이 반대편 선로에 진입했고 당시 전차한 제1080열차로 옮겨 붙었다. 제1080열차의 기관사와 지하철 사령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동안 불은 맹렬히 번졌고 이 열차에서 대부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피해를 더욱 부추긴 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늦장 대응한 것이다. 사령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1080호 열차에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땐 이미 화재로 역내 전기가 끊겨 전동차가 떠날 수도 없었고 역안 전등도 모두 꺼진 뒤였다. 사령에서 1080호 열차 기관사에게 다시 급전을 시도해 출입문 개방과 승객에 대한 대피 유도를 지시했으나, 기관사는 승객의 안전을 확보·확인하지 않은 채 마스터키를 빼들고 도망가 버렸고 출입문이 닫히면서 열차 안에는 142명의 승객이 갇히게 되었다. 차량에는 출입문의 비상 개방 장치가 갖춰져 있었으나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사용할 줄 아는 승객이 없었다. 차내에 있던 승객들이 유독가스에 질식하거나 불에 타 사망했다.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으나, 사고 직후 대구광역시와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방화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범인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질환이 심해진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출두해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사고로 지하철 관련기관 사이의 공조체제 구축하고 사고현장 탐색 및 복구, 훼손된 시신의 개인식별, 유족지원 등 대형참사와 집단사망에 따른 각 과정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이 참사를 교훈 삼아 재난에 대처하는 능력을 높이고 안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건립, 2008년 12월 개관했다.
 

[1929년 2월 11일] 바티칸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와 오랫동안 반목하고 대립해 온 로마 교황령(領)이 ‘라테란 협정(Lateran Concordat)’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으로 탄생했다. 협정은 교황 비오 11세(Pius XI, 1857~1939)를 대신해 교황청 국무장관 가스파리(Gasparri, Pietro, 1852~1934) 추기경과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1883~1945)가 서명했다.

로마 교황령이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가 로마를 점령한 뒤 교황 비오 9세(Pius IX, 1792~1878)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으로 존속하였으나, 영토 대부분은 1860년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59년간의 갈등 해소에 나선 사람은 1922년에 로마로 진군한 이탈리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무솔리니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절실했던 무솔리니는 가톨릭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무솔리니는 가톨릭을 이탈리아 유일의 종교로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몰수한 교회재산도 돌려줬다. 교황도 이탈리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답함으로써 무신론자인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시내에 있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영토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독립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이다. 바티칸 시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의 정식 명칭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聖座, Sancta Sedes)이다.

930년대부터 독립투쟁을 벌여 온 알제리는 1962년 7월 5일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출처_뉴시스)

[1956년 2월 13일] 알제리 독립 시위

알제리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나라로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182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프랑스는 1830년 처음 알제리를 침공한 이래,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나 현지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통치 하면서 전통적 부족 사회를 해체하고 주민들을 새로운 행정 단위로 몰아넣었는데, 이는 부족 소유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는 1962년 물러나기까지 135년 동안 알제리를 식민통치했다.

오랜 기간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알제리가 독립투쟁을 벌인 건 1930년대부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제리에서도 피어오르기 시작한 아랍 민족주의는 1945년 이후에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945년 5월 8일 2차 대전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알제리 독립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세티프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알제리인 1만여 명(알제리 측 추산으로는 4만 명이 넘는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알제리 독립투쟁의 방향을 게릴라·테러 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54년 11월 1일 자유민족전선(FLN)의 주도로 최초의 봉기가 일어난다. 이날 3,000여 민족해방군 전사들이 30곳이 넘는 프랑스 병영, 초소, 경찰서 등을 타격한 것이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강력한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들을 지지했지만, 우파 정당들은 알제리가 계속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56년 2월 13일 프랑스의 신임 총리 몰레가 아프리카에 있는 알제리를 방문했고 당시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알제리 국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수도 알제에서 몰레 총리의 차량을 막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는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잘 묘사하듯 수천 건의 도심 테러와 파업이 줄을 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 은퇴했던 프랑스 샤를 드골 장군이 정계로 복귀했다. 드골은 프랑스 정부를 진정시키고 알제리의 독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 에비앙에서 FLN과 협상을 벌였다. 이후 알제리는 독립운동을 계속한 끝에 1962년 7월 5일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 125만 명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본토로 향하는 동안 새로이 수립된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 측에 협력하거나 가담한 알제리 국민들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알제리는 8년의 전쟁, 5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 프랑스 당국의 고문과 강간으로 인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값비싼 대가로 치루면서 인류 전체를 위해 식민지배라는 역사를 끌어내렸다.

33번째로 남극조약에 서명하며 남극 연구에 참여한 우리나라는 처음에는 남극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연고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지를 준공했지만, 현재는 자원 개발보다 극지환경과 기후변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은 고무보트를 타고 남극해를 건너 세종과학기지로 향하는 모습. (출처_뉴시스)

[1988년 2월 17일] 남극세종과학기지 준공

남극세종과학기지는 남극 킹조지 섬에 건설된 한국 최초의 남극 과학기지이다. 세종기지는 서남극 남극반도에 평행하게 발달한 남쉐틀랜드 군도(South Shetland Islands)의 킹조지섬과 넬슨섬으로 둘러싸인 맥스웰만(Maxwell Bay) 연안에 있다. 방위각으로는 남위 62˚13', 서경 58˚47'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8년 2월 17일 세계에서 16번째로 준공되었다.

킹조지 섬은 남극대륙이 아닌 사우스쉐틀랜드 제도에 있지만 남극과 가까운 가장 큰 섬으로 남극 진입의 관문으로 불린다. 킹조지 섬은 남극대륙에 비해 접근하기 쉽고 비교적 기후조건이 좋다. 이곳에는 한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러시아, 칠레, 폴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중국, 페루, 미국, 독일, 체코 등 12개국의 13개 상주기지가 건설됐다. 이들 기지에 상주하는 연구원들은 연구 조사 도중 악천후를 만날 시 상대의 기지에 자유롭게 대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1986년 우리나라는 33번째로 남극조약에 서명하며 남극 연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남극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연고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지를 준공했지만, 현재는 자원 개발보다 극지환경과 기후변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는 본관동, 연구동, 숙소를 갖춘 기지가 건설된 뒤 발전동, 창고, 체육관이 설치되는 등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2000년에는 중장비 보관동이 신축됐으며 2009년에는 생활관동과 발전동이 추가로 설치돼 기지에 상주하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기지가 있는 지역의 고층대기와 대기빙하를 연구할 수 있는 연구동도 추가로 설립돼 남극 지역의 대기 관측과 해양환경 연구는 물론, 동식물 표본에 대한 연구, 남극 지역의 기초생산력 등의 조사도 수행하고 있다. 매년 정부부처, 연구기관, 대학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연구원들이 월동대원으로서 1년간 기지에 상주하며 지진파, 지구자기, 고층대기 그리고 성층권 오존 측정 등의 일상 관측을 수행하고 그 밖에 1월부터 약 2개월간 하계기간에는 40여 명의 연구원들이 세종기지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남극 탐사는 1978년 남극해 크릴 시험조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1988년에 1차 남극연구단이 세종기지를 방문해 해저 지형을 탐사하고 해양생물을 채취하는 등 조사 연구 활동을 벌였고, 연구 성과와 극지연구 능력을 인정받아 1989년 10월 세계에서 23번째로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O) 지위를 획득하며 극지 연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90년 7월에는 남극의 과학적 연구를 조정하는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의 정회원 자격도 취득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28일 세종과학기지 준공 30주년 기념 ‘남극체험단’ 발대식 개최했다. 지난 12월 9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5박 6일간 세종과학기지에 머물면서 현장 활동을 수행했다.

사진은 권희로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영화 김의 전쟁(김영빈, 1992)의 한 장면. 권희로 씨는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일본인 야쿠자를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였다가 일본서 복역한 후 영주 귀국했다. (출처_뉴시스)

[1968년 2월 20일] 재일동포 권희로 사건

재일한국인 권희로 씨가 야쿠자 2명을 라이플총으로 사살했다. 1968년 2월 20일 권희로는 시즈오카현 시미즈 시에서 야쿠자 2명과 말싸움을 하게 된다. 채권자의 청부를 받아 빚 독촉을 하던 상대편의 일본인 야쿠자가 그에게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모욕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총으로 이들을 살해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갖고 도주, 사건현장에서 45㎞ 떨어진 시즈오카현의 가와네 온천장에 있는 후지미야 여관에서 여관 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나흘 만인 24일 검거되었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 등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시즈오카현의 경찰본부장은 사죄의 방송을 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체포된 권희로는 8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 당시 그의 어머니 박득숙은 그에게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면서 흰 한복을 건네기도 했다. 권 씨는 체포된 뒤 무기징역형을 살다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석방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권희로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멸시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요구하는 등 재일동포의 인권문제를 부각시켰다. 일본에서는 건국 이래 4대 테러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분노는 폭포처럼’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1991년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김의 전쟁’과 1992년 유인촌, 이혜숙 주연의 ‘김의 전쟁’이란 영상물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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