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사랑은 절실하다.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해한다는 것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시사매거진=이선영 기자] 아주 오래된 연인에게는 뜨거운 고백이나 열정적인 연애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는 권태로워지고 이별의 아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반복되는 위기와 사소한 변심은 다정했던 사이를 끝내 무너뜨린다. 오래 만나오는 동안 잊은 것이다. 서로가 긴 슬픔을 지워가며, 긴 계절을 지나가며 사랑해왔음을… 숨소리만으로 모든 걸 알 수 있고, 눈빛만 보고도 상대방을 이해해왔음을….

인생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절절했으나 때론 지독했던 인연도 결국 사라지겠지만, 사랑이 있기에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법안 시인에게 삶이란 사랑이 끝난 뒤에 오는 그리움,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해지는 그리움의 대상이 있게 마련이고, 그는 배우자이거나 한평생 마음에 묻은 사람일 수 있다. 시인은 수많은 계절을 지나면서 틈틈이 써온 사랑에 관한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시간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서정과

일상의 무늬를 그린 104편의 시

《아주 오래된 연애》에는 시인이 이십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틈틈이 써온 글들이 담겨 있다. 젊은 시절에 느꼈던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 연서들과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낀 삶과 사랑에 대한 사색이 삼십여 년의 세월을 지나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군 시절 지금의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와 이제는 눈가에 주름살이 새겨진 중년의 아내를 바라보며 적어 내려간 시들이 사랑의 본질과 속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에게는 사랑에 관한 첫 번째 시집이자 절절한 ‘사랑의 비망록’인 셈이다.

지금 초소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내린 눈은 내 눈썹 끝에 눈꽃이 되지만

그대 생각으로 인해 이 초소의 밤은 따뜻합니다. (p.129)

 

갑자기 스물한 살 때 아내의 예쁜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 당신이 내게 바로 마약이었지.

그런데 그 마약 같은 당신은 어디 가고

할멈 같은 당신이 내 곁에 있지.

(…)

밥에 말아 먹지도 못하는 그놈의 돈 안 되는 시 쓴다고

무려 삼십 년을 애먹인 나 때문에

주름살 왕창 새겨진 아내.

아냐, 지금도 예뻐.

아냐, 매일 구박하는데 내겐 마귀야. (p.24-25)

 

작가는 104편의 시를 통해서 저물어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무릇 오래된 것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이 문득 추억으로 찾아오고, 그립던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면 일순간 마음이 헐거워지듯이 말이다. 추억은 흘러가버린 것이고 사랑은 아픈 것이라지만, 사람은 그것을 회상하고 반복하면서 성장해나간다.

책 곳곳에서 일상의 풍경을 붓과 먹으로 담아내는 정빛나 화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가로등 불빛이 따스한 골목, 능소화가 피어 있는 담장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이 젊은 날의 추억을 길어 올린다. 기억 저편에 머물다 그냥 가버린 사랑도, 오랫동안 곁을 지켜온 인연도 모두가 소중하다. 이 책은 가벼운 연애가 만연한 요즘 매몰되어가는 순수한 사랑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고, 사랑이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용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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