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이선영 기자) 위트의 달인이자 천재 휴머니스트였던 저자가 모 문예지의 젊은 편집자로부터 대중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청탁 받아 어떠한 체계적인 계획도 없이 시작한 원고의 서술이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책 '문주반생기'다. 이 책은 그러므로 저자에 의하면 킬링 타임 북 -시간 죽이기 좋은, 재미로 읽는 책- 이라는 위상을 가진다.

그러나 영어, 한문, 일본어, 그리고도 각종 어(語)와 문(文)에 능통했던 저자의 다채롭고 현란한 어휘 구사 앞에서 독자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지 모른다. 위트와 해학, 문학과 다양한 학문의 높은 경지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가운데 특유의 한문투 문체가 텍스트 곳곳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이로 인해 독자들의 머릿속에 지끈 지끈 쥐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서고금의 서적을 널리 읽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던 저자가 하나의 문장을 통해서도 무수한 시간의 지적 행간을 담아 독자들의 머릿속을 종횡무진 헤집어놓기 일수이니 잠시라도 맥을 놓치면 이미 지나왔던 부분들로 수차례 되돌아가는 일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촘촘한 저자의 문로(文路)를 차근차근 따라가 볼 고요한 열정을 지닌 독자들이라면, 일단 눈과 머리에 그 특유의 글쓰기가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통쾌한 재미, 식자소화(識者笑話: 전문지식을 알아야 웃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의 전범, 독보적 해학의 다이너마이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다른 책-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저술한 학술서-과는 달리 이 책 '문주반생기'를 통해 우리는 그러므로 살아 펄떡이는 글의 형상은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과의 다양한 일화들을 저자의 위트 있는 필치를 통해 만나는 일 또한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염상섭, 이은상, 현진건, 이광수, 최남선, 강경애 등 지금은 문학사의 한 성좌가 되어 있는 문인들과의 인연, 그들과 함께한 고난과 역경, 그 속에서도 자못 호기롭게 함께 나눈 풍류와 낭만적 순간들이 이 책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풍류란 어떤 것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채롭게 형상화될 수 있는 지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넓고 깊은 스펙트럼을 내포한 '문주반생기'라는 책이 이제까지는 술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들을 모아놓은 정도의 책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감내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 최측의농간의 판단이었다. 이 책에는 분명, 술과 관련한 다양한 일화들이 해학적으로, 때로는 애상(哀傷) 속에 그려져 있지만, 그런 일화들만 주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주반생기'라는 놀라운 텍스트의 다른 많은 빛나는 대목들을 크게 놓치는 셈이다. 이 책은 한 지식인이 자신의 반생을 회고하며 들려주는 흥미로운 후일담의 형태를 띄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온몸으로 살았던 당대에 관한 치열한 증언이 담긴, 생생한 르포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그저 재미있게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갖은 풍파로 점철되었던 한국 근대의 비극적 풍경들을 현미경과 만화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과 함께했던 격렬하고 유쾌했던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 일제강점기 속에서 자행된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보고와 분개, 서구의 앞선 문명에 무지했던 조국과 스스로에 대한 충격과 반성, 갖은 풍파 속에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신문물을 체득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했던 한 실존자의 의지가, 이 책 속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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