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논리 벗어나 중견국 책임 다해야

지난 10월 19일 세종연구소에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국가전략’ 포럼이 열렸다. 당시 이수훈 주일 대사 내정자 등 각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이날 포럼에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졌다.(사진_시사매거진)

(시사매거진 235호_김옥경 기자) 문재인 정부 대북 외교의 핵심적인 단어는 ‘평화’다. 이는 박근혜 전(前) 대통령의 ‘통일’과는 다른 개념이다. 얼핏 평화와 통일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통일은 북한을 무너뜨려 남한이 흡수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도발인 셈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평화는 다르다. 김정은 정권이나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고 지구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테니 ‘비핵화’를 통해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것이다. 베를린에서 발표한 ‘신(新) 한반도 평화비전’의 궁극적인 목표도 ‘핵 없고 평화로운 한반도’로 요약할 수 있다. 세간의 생각과 같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핵전쟁이자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으로서도 체제 인정과 항구적 평화구축이라는 제안은 수용할 여지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이다. 현재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고집하며 끝장대결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 과정에서 ‘코리아패싱’ 문제가 야기되고 있고, 여기에 미국과 중국과의 강대국 이익까지 맞물리면서 한반도 역학관계는 동북아 4강의 대결로 심화하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비핵화를 통한 평화’가 아니라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투 트랙(two-track)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즉 비핵화와 평화 구축이 등가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표점을 향해 가는 두 전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로써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통한 경제협력이나 사회, 문화, 체육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先 평화협정 체제, 後 비핵화 전략
일련의 사건 속에서도 북한이 보여준 태도는 명확하다. 핵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런 북한을 놓고 미국과 한국은 먼저 핵을 포기해야만 평화협정이나 교류, 협력 등이 가능하다는 으름장 놓았다. 가야할 길은 먼데 비핵화가 입구에 떡 버티고 서서 양측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때문에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입구론이 아니라 출구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즉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실행과 시장통합, 사회·문화·체육 교류 활성화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협정 등을 먼저 이끌어낸 다음 그 기반 위에서 비핵화로 마무리하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조성렬 책임연구위원은 지난 달 19일 세종연구소에서 열린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국가전략’ 발제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는 출발점이 다른 문제다”라고 언급하며 “한반도 평화체제는 한국전쟁의 종식을 위한 과제인 반면 한반도 비핵화는 핵무기비확산체제 유지를 위한 과제로, 역사적으로 별개의 과정으로 진행되어왔다”라고 설명한다.
평화체제와 비핵화가 등가물로 연계된 첫 시점은 2005년 7월 22일 북한 외무성의 발언 때문이다. 당시 북 외무성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이 없어지는 것이며, 자연히 비핵화 실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발언했고, 이후 9·19공동성명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안보인센티브로 한반도 평화체제, 북-미·북-일 관계정상화를 제공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2015년 10월 1일 리수용 북한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기존의 태도를 바꿔 비핵화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북-미 평화협정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불량국가 북한과 수교를 제공한다는데 거부감을 드러내며 일명 ‘전략적 인내’를 구사하였다. 그 사이 북한은 핵무기를 고도화하였고, 지금은 사실상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일체의 대북전략은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조 연구위원은 이날 발표에서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한 비핵화를 선행하는 입구론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포괄적 추진으로 최종 단계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출구론이 필요하다”라며 “그것의 예비단계로 제안하는 것이 탐색적 대화 방식이다. 탐색적 대화란 별도의 물밑접촉을 통한 조건 없는 대화로, 북한 외 6자회담 참가국들과 회담 재개 조건을 조율하거나 남북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대변할 특사를 통해 큰 틀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 등이 가능하다”라고 설명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2015년 5월 22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5차 믹타(MIKTA) 외교장관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믹타(MIKTA)는 우리나라 주도로 설립된 중견국 협의체로 멕시코와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 5개국이 참가하고 있다.(사진_뉴시스)

중추적 중견국으로서 외교 역량 키워야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대국이 유래 없는 ‘스트롱맨’ 시대를 맞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까지 모두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김정은까지 가세하며 한반도는 전례 없는 경색국면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의 외교 역량이 절실하다. 4대 강대국의 입김 속에서 한국의 입지를 견고히 하는 동시에 한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견국의 지위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흔히들 국제정치를 힘의 정치나 강대국의 정치라고들 한다. 이는 국제정치의 흐름은 오직 강대국의 이익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약소국들의 이익은 희생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경우가 현재 한국이 속한 한반도의 정세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모색되는 외교 전략 중 하나가 ‘중견국 외교’다. 캐나다, 호주 등이 주창한 ‘중견국 외교’란 힘의 원리만 작용하는 강대국의 국제정치에서 벗어난, 도덕과 원칙에 입각한 외교를 표방하는 말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또한 ‘100대 국정과제’ 중 ‘국제 협력을 주도하는 당당한 협력외교’라는 명목하에 이러한 중견국 외교를 지향한다. 이와 관련해 아주대학교 김흥규 교수는 균형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4대 강대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외교안보 전략을 주문한다.
“미국과는 북한 도발에 대응하는 굳건한 동맹을 바탕으로 호혜적 책임동맹관계로 심화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사일 협정 개정이나 전시작전권 전환에 대한 협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더불어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실질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드는 중국의 핵심이익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전략적 소통을 통해 신뢰 회복을 위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즉 중국을 적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외교안보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더불어 북핵 위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김 교수는 정상회담이나 외교장관회담 등 다양한 고위급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통해 경제협력를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주효하다고도 덧붙인다.이어 김 교수는 “북한과는 현재와 같이 대화와 압박을 병행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정은에게도 북한의 정권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는 공존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야할 것이다. 또한 중국과는 장기적 투자를 위한 파트너십으로 가면서 한·중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김 교수는 4강과의 양자외교보다는 ‘소다자 외교’를 전략적으로 추진할 것을 요청한다. 한·미·중은 안보와 국제협력 분야로, 한·중·러/한·일·러 관계는 안보와 경제 위주로 소다자회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동북아플러스 책임공동제’ 구상의 구체화도 언급한다.

동북아 넘어 책임 있는 주체 되어야
동북아플러스란 동북아를 포함하되 이를 넘어서는 주변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환경조성을 우리가 주도해 나가겠다는 중장기 지역발전 비전이다.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집권 2기를 맞는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을 본격화하고 있고, 러시아는 ‘신동방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키워가려 한다. 이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바로 ‘동북아플러스 책임공동제’다. 여기에서 ‘플러스’란 공간적으로는 동북아를 넘어 아세안, 몽골, 인도, 호주, 러시아, 유럽까지 이어지는 확장을 뜻하며, 이슈적으로는 단순한 국가 생존을 위한 안보 논의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공영과 사회·문화, 가치·공공외교의 차원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다. 자칫 동북아의 안보틀에 갇혀버릴 경우 안보 딜레마와 진영 대결의 재생산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정세는 이제 특정국 주도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과의 전략경쟁 강화에 따라 한국에게는 양자택일의 압력이 가속화할 것이고, 정치·경제적 비용도 증대할 것이다. 한 예로 자국의 경제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트럼프 정부는 사드 비용과 방위비 분담을 대폭 한국에 떠넘길 개연성이 크다. 또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과 관여정책으로 무력사용 위험과 충돌 가능성이 커지는 동시에 중국과의 위기관리에 초점을 맞춰 동북아 정세를 이끌어갈 가능성도 크다”라고 김 교수는 역설한다.
때문에 이제는 강대국 편승형 국가에서 평화협력 촉진 국가로 거듭나야 하며, 중추적 중견국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를 위해 미국과는 동맹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한편 중국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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