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락에서 간디에 이르는 인도의 전투적 비폭력 독립운동사

(시사매거진_이은진 기자) 신간 소개

“간디의 철학과 정치적 활동은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간디를 위대한 성자(聖者)로 혹은 약삭 빠른 정치적 조정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간디는 항상 인도라는 생각과 함께 나아갔지만 동시에 가장 세계화된 사람으로서 그의 비폭력과 세계 평화의 이념은 오늘날 전 인류의 신조이다. 그 는 전통주의를 고수하면서도 근대적 시민 사상을 외치는 보수주의자이자 급진주의자였다. 간 디는 소박한 애국자로 혹은 철학적 아나키스트로 평가받기도 했다. 간디는 인도 국민의 힘을 강화하고 영국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비폭력을 사용했다. 비폭력 행동은 소극적 저 항이 아닌 적극적 투쟁이었다. 통치권에 대한 국민의 협조와 복종을 철회함으로써 지배자의 힘 의 원천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었다. 간디는 폭력의 지지자도 아니었고 양심적인 반대자도 반전 (反戰)주의자도 아니었으며 ‘폭력 없는 전쟁’의 실험자였다. 그는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시위, 하르탈, 피케팅을 곧잘 주동하는 출중한 조직 능력을 갖춘 아나키스트였다. 간디가 독립운 동을 이끌어 가면서 무력 투쟁 대신에 비폭력 저항운동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영국도 폭 력 진압 일변도가 아닌 자제심을 보일 수 있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은 영국인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나아간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40년간 인도사 연구에 전념해 온 역사학자 조길태 교수가 세포이 항쟁 전후 200년간 인도 독 립운동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인도의 독립 운동사는 영국의 제국주의와 인도의 민족주의가 충돌한 역사이다. 영국의 원대하고 치밀한 제국주의 정책은 열강들의 식민 정책의 표본이 되었고, 이에 대한 인도의 저항운동은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은 국산품 애용운동 인 스와데시운동에서 시작하여 자치운동, 농민운동, 간디가 주도한 범국민적 사티아그라하운동 등을 총망라하여 다루었으며, 특히 마하트마 간디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활동은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서술을 유지하면서도 거침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 인도 독립운동의 핵심은 간디가 주도한 범국민적 운동이다. 간디의 독립운동은 무기력한 평화 주의 이론가의 활동이 아닌, 용감한 아나키스트의 저돌적인 투쟁이었다. 국민회의와 농민 ・노 동자가 함께 열광적으로 참여하는 간디의 비폭력비협조운동과 시민불복종운동의 물결 속에 서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혁명적 애국운동은 곧잘 묻히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독립운동 또한 자세히 서술했다. 최고의 명예와 부가 약속된 인도문관직을 포기하고 인도국민군의 사령관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애국 활동은 매우 감동적이며, 모험적이 고 낭만적인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인도 국민의 애국 투쟁과 비교한 부록을 실어 우리의 역 사를 세계사 속에서 조명했다.

1947년, 인도는 200년간의 식민지를 종식하고 자유를 찾았으나 광복과 동시에 인도와 파키스 탄으로 분립되는 비극을 맞는다. 한 민족이었던 두 국가는 현재 서로 핵무장을 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한반도의 현주소에서 이 책은 우리의 역사와 상황을 반추한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이 현 난관을 대처해 나아가는 데 훌륭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침략적 민족주의인 제국주의와 생존을 위한 민족주의가 처절하게 충돌한 인도 독립운동의 역사
영국의 인도 지배는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세포이 항쟁(1857~1858)을 경계로 이전 100년은 영국동인도회사가 지배했고 이후는 영국 정부가 직접 다스렸다.  영국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의 인도 통치는 정치적 통일, 법과 질서, 평화, 서구식 교육과 철도의 도입 등, 인류애에 입각한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인도아대륙은 영국의 스무 배 크기로 러시아 를 제외한 유럽 전체와 견줄 만했다. 영국은 이 광대한 지역을 통합했고 인도 사회의 인종, 계 급, 언어, 종교, 풍습 등 수많은 분열상을 극복하도록 도와, 유혈과 폭력의 국가에 통일과 질서 를 부여했으며, 법의 지배에 입각한 민주국가의 길을 견고하게 다지는 위업을 달성했다. 산업혁 명을 거친 선진 과학 기술을 인도에 도입하여 산업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동인도회사가 처음 벵골 지방으로 진출하여 10여 년 동안 자행한 수탈 행태의 결과는 인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난이었다. 벵골주민의 3분의 1인 약 1000만 명이 아사 혹은 병사하는 참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증유의 기근은 동인도회사의 무자비한 수탈로 주민이 만성적인 빈곤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 피해가 증폭 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이자 수요지인 상품 시장으로서 전형적인 식민 지의 모습으로 추락했다. 수 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던 전통 면직물 산업은 비참 하게 몰락했다. 반면, 상업・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동인도회사가 보인 집요한 상업적 이익 추구 와 수탈은 계속되었다.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눈으로는 인도의 처참한 빈곤과 모든 어두운 문 제들은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와 그 정책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인도국민회의가 출범한 1885년은 ‘새 인도’가 시작하는 해였다. 국민회의는 인도 민족주의운 동의 구심점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은 항상 국민회의가 뒷받침해 주었다. 간디가 곧 국민회의이고 국민회의가 곧 간디였다. 그러나 영국인 관리에 의해 전략적으로 설립된 국민회의는 처음에는 매우 온건하고 영국 정부에 충 성적인 집단으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인도의 일반 대중이 다수 참여한 애국운동인 스와데시(국산품 애용)운동은 인도 국 민운동과 국민회의의 성격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벵골주민이 분기(奮起)한 것은 벵골 지방 의 민족주의 세력을 양분하려는 책략에 대한 정치적 항거일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전통 면직 물 산업이 붕괴된 데 대한 경제적 항거였다. 국민회의가 인도의 지식층에게 조국에 대한 고상 한 애국심을 심어 주었다면 스와데시운동은 다수의 신세대에게 민족적 자각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스와데시운동은 인도인들에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고 협동으로 치유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이 위력적인 애국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민회의 내에서도 영국 정부에 친화적인 국민회 의의 활동에 비판이 일어났다. 온건파와 과격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고칼레와 온건파는 국 민회의를 변질시키려는 틸락과 오로빈도 등 소수 과격파를 폭력으로 축출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이 전개되면서 틸락을 비롯한 과격파는 10년 내에 권토중래하여 자치운동을 이끌며 국 민회의로 되돌아왔고 온건파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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