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바람, 여자, 가뭄, 말, 그리고 신화의 섬

(시사매거진_이은진 기자) 신간 소개

신화의 섬, 제주

세계문화유산의 땅 제주섬은 그냥 이방인이 불렀던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이 아니다. 여기에 ‘가뭄과 말(馬)’이라는 개념을 보태어 ‘돌, 바람, 여자, 가뭄, 말’이 많은 ‘오다(五多)’ 섬으로 연결시켰을 때 비로소 제주는 ‘삼다’라는 신비주의를 벗고, 역사적 리얼리티를 선명히 드러냄과 동시에 척박한 땅인 제주에 목축과 농업이라는 산업적 시야가 넓어지며, 제주 문화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오다’의 개념을 서로 연결시켜 제주를 바라보아야 ‘삼다’를 만든 제국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제주의 역사, 즉 제주의 정치사, 경제사, 생활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주섬의 정치사는 침략과 복속의 역사를 보여 준다. 권력 투쟁의 이면은 유배의 섬을 만들었고,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은 외지인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과 결합되었다. 광복 후 제주도민들이 좋은 사회, 자주적 평등 사회를 지향했던 것도 착취의 섬을 벗어나고자 했던 이어도의 꿈과 무관하지가 않았다.

제주의 경제사는 그야말로 왕조를 위해 생산을 담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제주인들은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말테우리〔牧者〕, 답한이, 포작인, 장인, 잠녀들의 삶을 보면 수탈 경제 그 자체였다. 제주섬에서 생산자의 역할만 있고 가져보지 못한 민중들의 소외는 급기야 제주 공동체의 대동주의를 탄생시켰다.

제주의 생활사는 말 그대로 일상의 행위, 전통이라고 부르는 제주인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사냥, 목축 문화, 해양 문화, 굿, 신화와 전설, 돌 문화, 노동요, 표류와 표착 등 육지라고 부르는 한반도의 생활사와는 다른 특성이 드러난다. 특히, 역향(逆鄕)이라는 왕조의 낙인이 찍힌 저항 정신은 육지의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다.

이제 제주를 알려면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잃어버린 민중의 역사를 도외시해서는 진정한 제주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오늘은 바로 지난 세대의 제주인들의 삶이 쌓인 결과다.

 

돌, 바람, 여자, 가뭄, 말

섬사람들은 바다 너머 이어도라는 이상 세계를 마음에 담고 평생을 살았다. 물로 갇힌 섬의 억압적 마음이 물마루 너머 새로운 해방구를 꿈꾼 까닭이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섬의 이어도는 바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바다 그 자체였다. 바다는 섬의 생명을 키웠고, 죽음을 거머쥔 삶의 높은 고지(高地)였기에, 그것이 너무 가까이 있는 나머지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바다는 섬의 이어도였다.

돌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돌로 만든 용기들이 삶의 언저리에 꽉 차 있다. 화장실도 돌이고, 돼지 밥그릇도 돌이다. 구르는 돌로 밭담을 쌓아 바람을 막았다. 돌로 집을 만들고, 우물을 만들었다.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섬 둘레를 돌로 둘렀다. 제주의 무덤 또한 ‘산담’이라고 부르는 돌담으로 울타리를 둘렀다.

제주의 바람은 제주의 생태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다는 오래지 않아 ‘늣(싱경이)’이 낀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태풍이 불지 않아도 걱정을 한다. 태풍은 바다의 수온을 내리게 하고, 물밑에 가라앉은 땅의 이물질들을 뒤집어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바람은 신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잠녀들이 모시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바로 그 여신이다.

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제주 여자들의 삶의 방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잠녀 물질이었다. 잠녀들은 반 벗은 몸으로 물질을 한다. 이는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적 관념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잠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다 속 돌과 돌 사이를 헤엄치며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의복 형태가 돼야 자유롭다. 그녀들에게는 부끄러움보다 생존을 위한 경제가 우선이었다.

섬에는 사람과 다른 두 짐승, 소와 말이 함께 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이 두 짐승을 돌보기 위해 거지처럼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테우리 마음대로 소와 말을 키워 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섬에 가뭄이 계속되고 기아가 찾아오면 섬사람들은 참다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소와 말을 몰래 잡아먹었다. 직접 소와 말을 잡은 사람은 교수형을 당할지언정 눈앞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불리 먹는 것을 택했다.

섬은 이유 없이 잠이 드는 법이 없다. 섬은 늘 깨어 있으면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섬은 역사에서 소외된 생산자들의 집단적 기억으로 하늘과 바다 속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비록 외세에 굴복한 쓰라린 섬의 역사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승리하는 희망을 품는 것도 섬의 마음이다. 섬에서는 현실의 패배가 상상력의 승리로 전화(轉化)된다. 설화 속에서라도 영웅을 만들어 내고, 심방〔무당(巫堂)의 제주 방언〕의 입을 빌어 양반과 권력자들을 징치(懲治)한다. 그래서 섬의 기억은 쓰리도록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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