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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으로 살다간 윤동주체포 당시 일본에 압수된 유작 찾아내야
  • 김옥경 기자
  • 승인 2017.10.0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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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연희전문 입학 후 찍은 사진.

(시사매거진234호/김옥경 기자)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_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詩)> 전문

1942년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에 쓴 시다. 제목만으로도 당시 시인이 가졌을 심경을 십분 헤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문학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요절이 더욱 안타까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간 윤동주는 민족시인이라기보다는 서정시인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이 시와 더불어 참회록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민족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참회록은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한 ‘창씨개명’이 부끄러워 참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다.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했을 터이지만 윤동주만큼 그 사실을 부끄러워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시인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그의 <서시(序詩)>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지만 정말 이 시대 우리가 윤동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암울한 현실을 딛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그의 마음이다. 죽기 직전 2년간 있었던 형무소 생활에서도 그는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시를 통해 저항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독립을 기다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간 시인 윤동주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만나보자.

 
 

 

 
 
지난 1월 11일 서울시인협회와 함께한 윤동주100년문화예술제가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을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탄생일인 12월 30일에는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에서 세계 시인들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비 제막식을 할 예정이라고 윤동주100년문화예술제 김상철 조직위원장은 말한다.

글로 쓴 육필 원고, ‘한국인’ 정체성 일깨워

시인 윤동주는 한글로만 시를 썼다. 한창 활동했던 1930~40년대는 많은 시인들이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한문투성이 시를 쓰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써진 윤동주의 한글시는 지금 읽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시어들이다.

김상철 윤동주100년문화예술제 조직위원장은 “윤동주 시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은 윤동주의 육필을 보고 두 가지 점에서 놀란다고 한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시들이 거의 완전한 한글체로 쓰여졌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필체마저 정감 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라며 “윤동주는 그 시절 다른 시인들에 비해 육필 원고가 상당히 많이 전해지고 있는 사실도 고마운 일이다. 원고지 칸마다 정갈하고 얌전하게 쓰여 있는 글자들이 그저 딱딱하던 육필로 남겨진 다른 시인들에 비해 생소하지 않고 친근감이 간다. 펜으로 쓴 글자 한 자 한 자에 시인의 감정이 묻어있다. 수정 작업한 곳에도, 마침 점에도, 시 끝에 꼭꼭 적어놓은 날짜들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소장하고 있던 도서의 귀퉁이에 적어놓은 친필 서명이나 낙서 같은 것들에서도 윤동주 시인다운 숨결이 느껴진다”라고 술회한다.

“중국에서는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칭하고 있으나 윤동주는 한번도 한국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라는 김 위원장은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공식 문서가 많은데, 학적부와 판결문이 대표적이다. 광명학원 중학부 학적부와 연희전문 학적부에 기록된 윤동주 시인의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동 76번지’다. 또한 일본 재판부 판결문에도 본적이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윤동주 시인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절대 문건이라 할 수 있다”라고 덧붙인다.

때문에 김 위원장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해오고 있다. 올 1월에는 일찌감치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서울시인협회와 함께 ‘윤동주 100년 선포식’을 개최하는가 하면 3월 29일부터 4월 18일 3주 동안은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을 대여하여 사진으로 보는 ‘윤동주 생애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행사에는 종로의 윤동주문학관과 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여수 MBC, 윤동주의 조카이자 가수인 윤형주와 송몽규의 조카인 송시연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이밖에도 9월 15~17일 군포시에서 윤동주 100주년 전시와 공연, 시낭송, 캘리그라피 체험 등을 시작으로 윤동주 탄생일인 12월 30일까지 다양한 행사와 전시회를 계획 중이다. 특별히 12월 30일에는 상암동 하늘공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행사에는 세계 시인들과 많은 시민들도 함께 초청해 윤동주100년문화예술제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라고 김 위원장은 포부를 밝힌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묶어 만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왼쪽)과 증보판(오른쪽). 증보판에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이 빠지고, 정병욱과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일주의 후기가 실려 있다.

체포 시 압수당한 작품들 아직 행방불명

이 시대 우리가 사랑해마지 않는 윤동주는 과연 어떤 시인을 사랑했을까. 어떤 작품에 감동하며 가슴이 뛰었을까.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 교수가 쓴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윤동주의 말을 종합해 보면 프랑스 시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프랑시스 잠의 시는 구수해서 좋고, 장 콕토의 시는 염증이 나다가도 그 날씬날씬한 맛이 도리어 매력을 갖게 해서 좋고, 나이두의 시는 조국애에 불타는 열성이 좋다고 하였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가 발표한 <윤동주의 생애>에는 “중학 시절 그의 서가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아있고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은 정지용 시집과 백석 시집 사슴 필사본이다”라는 회고가 있다. 이외에도 윤동주는 김영랑과 이상 같은 시인들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을 아울러 가장 사랑받는 시인은 그 누구도 아닌 윤동주 자신이다.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중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윤동주 시집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일본은 이보다 빠른 1960년대부터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번역도 거의 완벽한 수준이라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다.

“처음에는 그가 유학했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시작했는데, 단순히 윤동주 시를 좋아하는 시인들끼리 낭독모임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지금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 시를 좋아한다. 한 예로, 지금은 작고한 일본의 한 유명한 시인은 윤동주 시가 너무 좋아 한국어를 배웠을 정도다. 한국어에 대한 책도 내고, 윤동주 시를 일본 교과서에도 실었다. 일본 당국이랑 7년을 실랑이했으나 단일 게재는 실패하고, 교과서에 실리는 자기 수필 속에 윤동주 시를 3편이나 넣어 결국 실었다”라고 김 위원장은 전한다.

윤동주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익히 알다시피 중국 용정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찾은 것도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학 명예교수다. 1985년 5월 14일 용정 동산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낸 오무라 교수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고, 다음날 인근 박물관에서 제기를 빌려 간단한 제상을 준비하여 예를 올렸다는 후담이다.

“살아생전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해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던 윤동주는 죽은 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해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윤동주가 유학을 떠나기 앞서 고향으로 왔을 때 자필로 써서 묶은 <윤동주 자선 시집>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두 분은 시집이 있으니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시인’이었으니까 시집을 묶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의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時人尹東柱之墓)’라는 글씨를 새겨 넣은 것이다”라고 김 위원장은 설명한다.

이어 윤동주100년문화예술제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던진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쓴 시는 총 5편이 남아있는데, 이는 모두 릿교대학 시절 쓴 것들이다. 상황적으로는 오히려 도시샤대학 시절이 시를 쓰기에 더 좋았다는 그는 그래서 윤동주의 시가 일본 어딘가에 더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윤동주는 일본에 1년6개월 정도 있었다. 동경 릿쿄대학에서 6개월,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1년 정도다. 도시샤대학은 한국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기독교대학이어서 이 시절이 그나마 편안했을 것이다. 정지용 시인도 이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가장 편안하고 학업에 열중했던 이 시기에 쓴 시가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때 귀국하려다 붙잡혔으니 아마 압수됐을 것이고, 그러면 분명 문서 보관하는 기관 등에 있을 것 같은데, 행방불명이다. 그때 시가 발견된다면 대단한 화제가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당숙 윤영춘의 <명동에서 후쿠오카까지>에도 시모가모 경찰서에 감금된 윤동주를 면회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본 형사가 자기 책상 앞에 윤동주를 앉히고 윤동주가 쓴 조선말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시켰다는 것이다. 그때 윤동주가 번역하고 있던 원고 뭉치는 상당히 부피가 큰 편이었다고 전한다. 때문에 김 위원장은 내년 쯤 일본을 방문해 좀 더 면밀히 알아볼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상암동 하늘공원에 세워질 윤동주 시비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 전 세계인이 시인 윤동주를 보러 한국으로 몰려오는 날을 꿈꿔본다며 멋쩍게 웃는다.

김옥경 기자  kak15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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