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끝없는 탐미’

(시사매거진234호 = 이은진 기자) 로봇은 오선지 속 음표들을 신속하고 정확한 기교로 소리 낼 수 있지만, 인간은 오선지를 마주했을 때, 곧바로 악기에 손을 얹지 않는다. 음악은 작곡가가 기염을 토하며 자신의 감정과 사유를 한 음 한 음에 담아 완성되고, 그 앞에 선 연주자는 작곡가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관객에게 전할 것인지를 고뇌하는 것을 소명으로 한다. 이렇듯 음악은 사색을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자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오늘날, 인공지능이 예술가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도 예술이 가진 본질적 깊이에 다다르지 못 한다는 주장을, 예술이 주는 가치를 되새겨봄으로써 확고히 해본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는 오늘날, 음악가를 상당히 흡사하게 흉내 낸 기술 제품들이 각종 품평회에 전시되고, 뉴스에 소개되며, ‘인공지능이 예술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를 화두로 던지는 오늘 날에 이르렀다. (사진 캡쳐 = YTN 뉴스)

"클래식 음악 존재의 이유"

예술 향유의 즐거움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사색’일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에는 창작자의 삶이 담겼기에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여 작품의 의도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하고, 타인(=창작자)과의 공감 지점을 발견하려 한다. 인간은 늘 존재의 이유를 알고자하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현대시대에는 창작자가 다양한 종류의 기록 장치와 매체를 통해 본인의 작품을 설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동시대를 사는 창작자와 예술 향유자가 비슷한 공감대를 갖는다는 점이 작품의 생명력을 갖게 하는데, 이미 수십 수백 년 전 창작자가 세상을 떠난 클래식 음악의 경우, 그 생명이 이어져오기 위해서는 후대사람들의 더 큰 고민과 책임감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영상과 사진 기술이 없던, 심지어 녹음 기술도 없던 그 옛날의 작품은 오직 희미한 잉크자국으로만 만날 수 있는데 이 마저도 오랜 전쟁과 혁명의 역사를 지나면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후대들의 끊임없는 사료 추적 노력으로 흩어진 조각을 맞추며 꿋꿋이 이어온 클래식 음악의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수십 수백 년 전 창작자가 세상을 떠난 클래식 음악의 경우, 작품의 생명이 이어져오기 위해서는 더 큰 고민과 책임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료들을 추적하고, 조각을 맞추며 꿋꿋이 클래식 음악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작곡가, 연주자, 관객"

클래식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3요소, ‘작곡가, 연주자, 관객’

인간이 로봇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품을 만들 리는 만무하여, ‘관객’이 대체될 리는 없겠다. 다만 앞으로도 클래식 음악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시장이 꾸준히 이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작곡가’와 ‘연주자’에 있어서는 음악가를 상당히 흡사하게 흉내 낸 기술 제품들이 각종 품평회에 전시되고, 뉴스에 소개되며, ‘인공지능이 예술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를 화두로 던지는 오늘 날에 이르렀다. 바보 같은 물음이라 단언할 수 있지만, 한번쯤 이 문장을 곱씹으며 예술의 가치와 본질을 돌이켜봄으로써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음이 더욱 확고해진다.

우선 과거 음악사의 흐름을 보면, 신(神) 중심의 중세시대에는 음악이 종교적 철학과 연결되어, 대수학, 천문학, 기하학과 함께 필수 교육 과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고, 인간이 삶의 중심으로 옮겨왔을 때, 작곡가는 자신이 느끼는 사랑, 상실, 희망 등의 희로애락과 삶의 철학을 음악에 담아내곤 했다. 이렇듯 음악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과 철학을 담으며 이어져왔다. 따라서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건 셈여림과 빠르기를 적절히 조절하며 알맞은 음을 소리 내는 것이 아닌, 창작자가 의도한 ‘감정’과 ‘사상’을 유추하여, 한 음 한 음에 물들여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소 흥미로운 점은 연주자도 인간이기에 사람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 그리고 연주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2차적인 해석도 각양각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최소한 두 번에 걸쳐 해석되는데, 그러한 수용 과정이 낳는 왜곡들 또한 클래식 음악의 매력이 된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태도가 창작자의 의도에 최대한 근접하게 재현하는 것이란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겠지만 이러한 사색의 과정 자체가 뇌에 즐거움을 선사한다.

(왼쪽) 음악의 성인 베토벤, 그가 남긴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형식적으로나 악기론적으로 높은 경지를 완성하여, 음악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일흔이 넘은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올해 9월, 음악의 성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완주를 택하며, 끝없는 여정을 보여주었다.

"전곡연주가 선물하는 새로운 경험"
“지난한 천착의 과정 끝에 이르는 예술의 경지”

클래식음악 가치의 입증은 ‘전곡연주’에서 정점을 찍는다고 말하고 싶다. 작곡가가 기염을 토하며 완성되는 작품. 하물며 한 작곡가의 작품 시리즈 전곡을 연주한다는 건 어떻겠나. 이것은 타인의 인생 전반을 온전히 흡수한다는 것과 같아 그 아무리 대가라도 전곡연주는 오르기 힘든 산이다. 하지만 이 지난한 천착의 과정에 뛰어드는 건 새로운 음악적 깊이를 경험하게 한다.

그렇게 한 작곡가를 깊이 파고든 연주자로는 ‘바하(J.S.Bach, 1685~1750)’ 연주의 대가 ‘글렌굴드(Glenn Gould, 캐나다)’, ‘쇼팽(F.Chopin, 1810~1849)’ 연주의 대가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 폴란드)’, ‘베토벤(L.V.Beethoven, 1770~1827)’ 연주의 대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아르헨티나)’이 대표적이며, 우리는 그들을 특정 작곡가의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른다.

국내에도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훌륭한 연주자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음악의 성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는 올해 9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떠오른다. 그는 2007년 베토벤, 2008년 메시앙, 2011년 리스트, 2013년 슈베르트, 2015년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시리즈를 연주하며 한 작곡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왔지만, 일흔이 넘은 그가 10년 만에 다시 음악의 성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완주를 택했다는 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베토벤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혁명과 전쟁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시기를 살며, 고전음악에서 낭만음악으로의 변화기를 이끌었던 인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별로 뚜렷한 변화 양상이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남긴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형식적으로나 악기론적으로 높은 경지를 완성하고, 당대의 상식에 없던 괴짜같은 도전을 과감히 오선지에 담아낸 음악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음악의 성서를 다시 택한 그는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세상을 더 느끼고 스스로의 연주를 퇴고하며 새로이 연구한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했다.

연주자로서는 기교가 노쇠하지 않기 위해 숱한 노력이 따르겠지만, 인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끝없는 탐미’, ‘예상치 못한 시도’가 만든 새로운 예술의 경지는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클래식음악의 가치임을 입증한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