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장사익의 ‘꽃인 듯 눈물인 듯’한 인생 역정

15개의 직업을 전전하다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소리꾼 장사익. 인생을 알고 노래를 시작하니 노래하는 것이 힘겨운 직업이 아니라 그저 즐거운 놀이라고 그는 말한다.(사진_시사매거진)

(사사매거진 233호 / 김옥경 기자) 그는 일반적이지 않다. 특이하다 못해 특출나다.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는데 판소리를 듣는 듯하다. 거칠면서도 맑은 듯 굴곡진 곡조를 읊조리는 그의 노래는 심연에서 끌어올린 태곳적 슬픔
마저도 풀어헤친다. 한바탕 흐드러진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가락을 뽑다보면 듣는 이도 도취되어 서러운 세상살이 흥타령이 절로 난다. 꽃인듯 눈물인 듯 알 수 없는 먹먹함이 가슴을 훑어내면 그제서야 관객들은 켜켜이 쌓인 인생의 먼지를 털어낸다. 그리고는 어느 하늘가를 뭉실거리며 ‘그래, 이것이 사람살이지’ 한마디를 속살거린다. 이 짙은 카타르시스에 매료되는 누구라도 그의 팬이 되고 만다. 45세 늦깎이 소리꾼의 노래인생은 그래서 지금 그 누구보다 흥청거린다.

“생각이 늘 날라다녀 내려앉지 않았쥬”
생각 ‘사(思)’자에 날개 ‘익(翼)’자를 쓰는 장사익 선생의 이름은 부친이 작명소에서 지었다. 굳이 풀이하자면 ‘생각하는 날개’ 정도일 것이나, ‘생각이 날아다녔다’는 그의 표현이 더 그럴싸하다. 젊은 시절 15개의 직업을 전전하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시간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거름이었다. 모진 세상살이 부평초처럼 떠돌며 꿈 언저리만 맴돌던 시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이름 잘 지었다고 헌다. 이름처럼 생각이 늘 날라다녔다. 내려앉지 않고 꿈만 꾸는 것이쥬. 그러니 이상과 현실이 늘 평행선이다. 이게 안 맞으니 헛갈리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한 일이 매제가 운영하던 카센터였는데, 힘들 때라 밥만 해결하면 된다싶어 했다. 기술이 없으니 맨날 청소하고 주차해주고, 커피 타주고 했쥬. 3년 정도 했는데 사업이 어려워 월급도 못 주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내 입이라도 하나 덜자 하는 마음으로 그만두었다. 그즈음 ‘내가 이럴려고 세상 사는 게 아닌디’ 하는 생각을 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인생을 반성했고, ‘뭔가 다시 시작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다. 밥만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작심했다. 그렇게 태평소를 하면서 또 깨달았다. 그 동안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가짜로 산 것이었다. 진정성이 없이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광수 사물놀이패를 찾았다. 돈은 필요 없으니 시켜만 달라고 사정하였다. 3년을 기한으로 태평소만 원없이 불다 그만두자는 생각으로 목숨을 걸었다. 엄동설한 야밤에도 한강 둔치에 나가 연습을 하였다. 굿판에서 쓸 가락을 구상하고, 얼어붙는 입술을 풀어가며 연습을 한 적이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도 하고, 1994년에는 KBS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에서 대통령상도 받았다. 날라다니는 생각을 따라 꿈을 좇으니 인생이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지은 것이 <찔레꽃>이다.
“잠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꽃향기가 진허게 났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큼 장미가 피어 있어 그 향긴가 하고 가서 맡아봤더니 아닌거여. 그래서 한번 더 유심히 둘러보니 저 아래 찔레꽃이 피어있는 거여. 아, 순간 눈물이 팍 났네. 내 신세가 그 찔레꽃 같아서, 나도 이런 진한 향기가 있는 사람인디 왜 몰라줄까 허고.”

“몇 번 보고 흥얼거리기도 허고, 읊조리다 보면 고조장단,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곡조가 만들어지고 노래가 완성된다. 내가 제대로 음악을 배운 것이 아니라서 악보를 그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감흥대로 흥얼거려 보다가 소리판 친구들과 얘기헌다."(사진_시사매거진)

“노래라는 것이 나헌티는 꽃이고 눈물이구나”
지난해 2월 장사익 선생은 목 수술을 하였다. 보름 정도 입을 틀어막고 말 한 마디 못했다. 그리고 10월까지 목을 아끼느라 노래만 들었다. 재즈에서부터 멕시코 대중가요까지, 노래인생의 이정표를 찾아가는 귀한 시간이었다.
“처음 진단을 받고 수술 얘기가 나올 때는 목소리가 안 나올 수도 있다는 말에 두려움이 앞섰다. ‘이 나이에 무얼 뭘 해먹고 사나’ 정말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고 말을 못하는 시간 동안 많을 걸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을 못하니 넘들 얘기를 많이 들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런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그러면서 노래라는 것이 나헌티는 꽃이고, 노래가 없는 인생은 눈물이라는 생각을 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꽃인 듯 눈물인 듯>이다. 지난해 10월 수술 후 옹골지게 벼린 목소리로 선 첫 무대였다. 김춘수 선생의 시 <서풍부(西風賦)>에서 따온 이 시구는, 노래를 잃었던 인생과 노래를 찾았던 인생의 시간이 극명하게 대비된 당시의 심경을 그대로 담았다. 이처럼 장사익 선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마다 마음을 사로잡는 시가 가사가 되고, 그때 느끼는 희로애락을 덧대면 곡조가 된다.
“몇 번 보고 흥얼거리기도 허고, 읊조리다 보면 고조장단,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곡조가 만들어지고 노래가 완성된다. 내가 제대로 음악을 배운 것이 아니라서 악보를 그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감흥대로 흥얼거려 보다가 소리판 친구들과 얘기헌다. ‘여기에는 해금을 집어넣으면 좋겠고, 여기는 소리북이 들어왔으면 좋겠네. 가락은 굿거리와 자진모리가 좋겠다’ 허는 식이다. 그러면 그 친구들은 전문가라 금방 기술적으로 만들어낸다.”

8집에 실린 <상처>라는 시가 있다. 탁자를 치며 ‘아, 이런 대목들이 기맥히잖아요’ 하며 참으로 살가운 얼굴로 그 기맥힌(?) 대목을 구렁이 담 넘듯 노래한다.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게 그냥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칠십을 바라보는 그가 깨우친 세상의 이치리라. 사랑스러우면 그냥 사랑스럽게, 우스우면 그냥 호쾌하게 웃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어보니 세상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나날이다. 백세까지 노래하다 생을 마감하고픈 그에게 노래가 있는 한 남은 날들도 그럴 것이다. 더 사랑스럽고, 더 맑은 웃음으로 초상집 흥타령처럼 우리네 슬픔을 씻어내며, 그렇게 노래가 흐드러지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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