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정 전(前) 국가대표 유도선수이자 용인대 교수

(시사매거진232호=김옥경 기자) 어느 분야든 ‘최초’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남들보다 앞서 어떤 일을 해낸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노력 없이 오는 기회는 없고, 스쳐가는 기회를 기다리지 않은 사람이 잡을 수는 없다. 특히 스포츠 세계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무수한 훈련이나 연습 없이 시합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을까. 최고를 향한 여정이 남들보다 혹독하지 않다면 그 목표점에 남들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여자 유도선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였던 김미정 선수가 걸어온 길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인터뷰 후 용인대 유도학과 교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미정 교수. 뒤의 상패들은 선수 시절 수상한 것들이다.(사진=시사매거진)

김미정 선수는 현재 용인대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과 유일한 홍일점이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가장 무서운 교수로 통한다. 워낙 유도라는 종목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제 몫을 해내려다 보니 자연스레 칼 같은 카리스마를 겸비하게 되었다는 귀띔이다. 1987년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늦은 시기에 유도를 시작한 그는 1989년 정식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선발된다. 1990년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91년에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 세계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선수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다나베 요코 선수로, 전부가 다나베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할 만큼 기량차가 있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한국에서는 여자 유도 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을 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사실은 당시 김미정 선수는 유도를 시작한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1994년 아시안게임 우승을 마지막으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은퇴했다. 이로써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은퇴할 것’이라는 생애 목표까지 이루었다. 이후 지금까지 김미정 선수는 척박한 한국 여자 유도계를 이끌며 후진을 위한 새로운 길을 부지런히 개척하고 있다.

징크스도 달아나게 만드는 끝장 성격
운동선수에게 징크스란 무엇일까.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단순한 행위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단순한 그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두려움은 왜일까. 이 두려움의 감정이 실력보다 앞서 선수들을 옭아매게 되면, 좋은 성적을 위해 행했던 징크스는 오히려 올무가 된다. 때문에 애당초 징크스 같은 건 없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런데 이런 징크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기는 선수가 바로 김미정 선수다. 징크스를 다잡아 당당히 한판승을 펼친다.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징크스적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나나를 먹고 시합에 지면 사람들은 징크스로 만들어 다음부터는 절대 바나나를 안 먹는다. 그런데 나는 다르다. 나는 (시합에서) 이길 때까지 바나나를 먹는다. 내가 바나나를 먹고 진 것은 내가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바나나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때문에 더 열심히 연습하고 바나나도 더 열심히 먹어서 징크스를 없앤다. 한마디로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다. 원래 성격이 뭘 해도 끝을 보는 편이다.”
이런 성향 탓에 그는 뭘 해도 지는 법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승부욕은 딱지치기를 해도 이겨야 하고, 인형놀이를 해도 다른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했다. 아마 유도가 아닌 다른 운동을 했어도 곧잘 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어떤 운동보다도 유도가 가지는 매력은 크다고 그는 말한다.
“처음 유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체고 재학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체고는 아침마다 전 종목 선수들이 모여 체력운동을 했다. 그때 나는 투포환 선수였는데, 체격이 왜소해 선생님이 훈련 대신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때 훈련하는 유도부를 유심히 보게 됐는데 정말 멋있었다. ‘운동을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데…’ 할 정도로 격하게 훈련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운동은 힘들어야 한다는 주의다. 하지만 유도부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유도는 남자들만이 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투포환 선생님이 나에게 유도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을 때도 싫다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당시 투포환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유도부는 꽤나 매력적인 부서였다. 정작 유도라는 운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빡센 체력훈련에 혹해 들어간 유도부가 실은 자신의 운명이었던 사실을 그때는 아마 몰랐으리라.

서러웠던 2군 시절, 세계 제패 발판 돼
김미정 선수가 유도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시작한 유도는 그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타고난 하체와 힘으로 유도를 시작하고 6개월 뒤에 있은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상은 신동이 났다고 환호했고, 이어 치러진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기 마련이듯, 환희에 이은 고배의 잔은 쓰디썼다. 그해 12월에 국가대표 2진에 선발돼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대표선수들의 파트너로 지낸 1년여 시간이 그러했다.
“88서울올림픽 때 여자유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 처음 2군으로 선발되었을 때는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유도를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만에 대표선수가 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2진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올림픽이 10월이었는데, 그때 마침 추석이 끼어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명절에 문을 여는 가게도 없어서 대표선수와 숙소가 달랐던 우리는 명절날 종일 굶었다. 아무도 2진 선수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대표팀 코치가 뒤늦게 알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여줬다. 그런데 이보다 더 서러운 것은 주최국이 우리나라이다 보니 선수들에게 쇄도하는 기업체 지원이나 물품, 경기현장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2등 안한다고.”
그렇다고 그 시간이 서럽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유도를 시작하고 6개월 만에 시작한 국가대표 선수 생활은 기술이 부족했던 그에게 최고의 호기(好機)였다. 지금도 그는 그 시절에 유도에 대한 모든 걸 배웠다고 말한다. 또 2진 시절이 없이 계속 1등만 했다면 참으로 오만했을 것이고, 2진의 서러움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소회한다.
“정식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1년 뒤인 1991년 다나베 선수랑 붙었던 세계선수권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전까지 두 번을 다나베 선수와 붙었는데 처음에는 한판으로, 그 다음엔 절반으로 졌다. 당시 다나베 선수는 세계 랭킹 1위로, 1위도 보통 1위가 아니라 상대할 선수가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대진표상으로 다나베와는 결승전에서 붙게 되어 있었는데 하다 보니 내가 결승전까지 가게 됐다. 대표팀에서는 져도 은메달이니 시합도 하기 전에 ‘잘했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아무도 내가 이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시합을 하니 막상막하였다. 대표팀에서는 난리가 났다. 판정승도 노려볼 만했기 때문이다. 흥분한 감독님이 10초만 버티라는 뜻으로 ‘10초’라고 외치는 순간, 내가 다나베 선수를 넘겼다. 판정승이 아니라 효과로 확실히 이긴 것이다.”
유도인들은 한판으로 메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내가 상대선수를 메쳤는지, 상대 선수가 메쳐졌는지도 모를 만큼 찰나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을 썼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몸이 먼저 상대방의 힘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유도의 매력이라고 김미정 선수는 역설한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아보고 싶다며 웃는 그는 카리스마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사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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