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세력의 불법적 권력 장악…제2공화국의 붕괴

1961년 5월16일 새벽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제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 장교들과 사병 3,500여 명을 이끌고 중앙청과 중앙방송국 등 서울에 있는 주요 기관을 일시에 접수했다. 새벽 5시, 서울 중앙방송국 당직 아나운서가 박정희 소장의 요구대로 6개 항의 혁명공약을 읽어 내려갔다. “혁명공약!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1961년 5월16일 새벽,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그렇게 붕괴되어 갔다. 

 

한강어구에 다다른 쿠데타 세력은 해병대, 공수여단, 제23사단 병력을 주축으로 진군하던 중 서울 진입을 저지하는 헌병들과의 총격전에서 승리해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어 주요 기관과 방송국 등을 장악한 구테타 세력은 오전 5시경 방송을 통해 6개 항목의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오전 9시에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날 오후 국회 해산과 함께 정당과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시킨 이들은 정부 각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오후 7시 장면 민주당정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쿠데타의 성공을 대내외에 알렸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해 성공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얼마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고 쿠데타 두 달 뒤인 1961년 7월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의 의장에 오른다. 그리고 3년 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한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했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했다.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 만인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한다.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해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5.14군사정변은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 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89년 5월3일] 5.3 동의대 사건

1989년 5월3일 경찰이 부산 동의대 도서관으로 진입했다. 전날 학생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전경 5명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사건의 시작은 4월30일, 5월1일 노동절을 맞아 부산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고 파압을 지지하는 시위에서 시작됐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진출해 인근의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으며 경찰은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기 위해 실탄 24발을 발사하고 주동자를 검거했다. 다음날 학생들은 경찰의 총기난사 규탄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다시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하자, 학생들은 시위대로 위장하여 사찰 및 검거 활동을 하던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도서관에 감금하고 농성했다. 

학생들은 감금한 경찰들과 연행된 학생들을 교환 석방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에 응하지 않고 5월3일 새벽, 도서관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7명이 사망했다. 3명은 불에 타 숨지고, 4명은 불길을 피해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이밖에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진압 결과 학생 90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77명이 구속, 31명은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또는 현조건물방화치사상죄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을, 47명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화재 원인에 대해 검찰은 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서관 복도에 시너와 석유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 1심과 2심에서 화재 원인을 달리 판정했다. 경찰과 검찰은 화인감정서 제출을 거부하는 등 화재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 대해서도 사전에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는 등 안전 조치에 만전을 기하지 않고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후 2002년 5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1인당 2,5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결정,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에 이 사건으로 순직한 경찰관 7명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1962년 5월12일] 남산 케이블카 개통

우리나라 최초의 여객용 ‘삭도(索道)’인 남산 케이블카(cable car)가 지난 1962년 5월12일 개통됐다. ‘은하수’ 호와 ‘무지개’ 호로 개통된 남산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남산케이블카는 그 당시 제본회사를 운영하는 한성진 씨가 사업차 해외에서 본 케이블카를 본 게 그 시작이다.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1년 9월 착공해 당시 돈 2억 9,000만 환을 들여 준공되었다. 

남산 케이블카는 왕복식으로 2개 선로에 총 2대의 객실이 순환하며 교행한다. 선로의 길이는 605m, 노선의 평균 경사각은 약 77°이다. 운행 속도는 약 3.2 m/s로 편도 운행 시간은 3분 남짓이다. 지상과의 고저 차는 약 138m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되며 이 두 대의 케이블카는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마주쳐 지나가도록 설계되었다. 당시 한 차를 타려면 2시간 이상은 줄서야 했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각 객실의 정원은 38명,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1977년 9월1일 하오 6시 반에 남산케이블카가 운행도중 보조선이 끊겨져서 15분 동안이나 승객 20여 명이 상공에 매달린 사태가 발생한데 이어 1984년 10월8일에는 케이블카 제어가 말을 안 듣고 그대로 운행중에 멈춰져서 근 80명이 5시간 동안 매달린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또 지난 2002년 7월7일에는 상하행선 2대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해 60여 명의 탑승객들이 지상 40~50m 상공에 매달려 있다가 약 1시간여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 

한편, 지난 50여 년 동안 서울의 대표 명물이던 남산케이블카가 내년 2014년 철거될 전망이다. 1962년 첫 운행을 시작한 남산 케이블카는 그동안 노후화 및 수송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시에 따르면 현재 최대 수송 인원이 48명인 남산 케이블카는 시간당 500여명을 수송하는 데 그치고 있다. 시는 케이블카 노선을 지하철역이 있어 접근성이 좋은 예장공원으로 옮기고, 곤돌라 리프트를 활용해 수송 인원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