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제 회생 성과와 복지국가 희생 과오 동시에 남겨

마거릿 대처 前 영국총리가 4월8일 뇌졸중으로 영면했다. 향년 87세. 그녀의 부고가 전해지자 진풍경이 펼쳐졌다. 데이빗 캐머론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前 총리 등 영국의 전·현직 총리와 정계는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반기문 UN 사무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런던 거리엔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시위대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대처를 조롱하는 구호를 외쳤다. 한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은 좀처럼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마거릿 대처는 1925년 영국 중부의 조그만 시골마을인 그랜섬에서 잡화점 주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랜섬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고향이기도 했다. 대처의 고향인 그랜섬 주민들은 ‘근면, 절약, 자조’라는 덕목을 공유했다. 이 같은 덕목은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군림했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이기도 했다. 대처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는 점에 감사하고 있다. 누구나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회상할 만큼 고향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고향 주민들의 시민도덕은 훗날 ‘철의 여인’으로 성장할 대처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보수당 대학지부 회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엔 보수당의 유력한 지지자이자 부유한 사업가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다. 종교도 감리교에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 

결혼과 개종은 그녀의 이력에서 전기와도 같았던 사건들이었다. 재력가와의 결혼은 그녀로 하여금 정치자금 부담에서 자유롭게 한데다 개종은 영국 주류사회로의 입장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이라는 점만 빼면 그녀는 성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시골 잡화점 딸, 영국병 고치다 

그녀가 자신의 정치이력을 통해 펼쳤던 정책은 ‘대처리즘’으로 확립됐다. 대처리즘은 ‘작은 정부와 시장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요약된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하이에크는 “중앙집권적 계획에 의한 경제정책의 정부 독점은 필연적으로 정부의 전횡을 초래한다”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이론은 1960년대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영국 정가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경제·산업을 통제했고 이에 힘입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승전 경험은 계획경제가 평화를 담보하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정가에 확산시켰다. “정부지출 확대로 총수요를 증가시켜 완전고용을 지향한다”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은 계획경제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뒷받침했다. 하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 같은 인식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7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1970년대 들어 자본주의에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영국에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날로 세계화되는 경제 체제 속에서 영국 제조업 부문의 경쟁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어 갔다. 복지지출은 영국 경제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산업 경쟁력 약화에 따른 세수 감소로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복지지출 삭감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요약되는 복지국가의 신화에 손을 대려면 정치생명을 걸어야 했다. 

노조의 존재도 골칫거리였다. ‘큰 정부’와 산업국유화는 노조의 비대화를 불렀다. 1970년대 중반 영국 중앙정부 공무원수는 10년 대비 27%, 지방자치제 공무원 수는 70%나 늘었다. 경기침체와 이로 인해 인플레가 만연하자 노조는 파업을 벌였다. 노조의 파업은 1979년 노동당 캘러핸 정부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영국은 연일 횡행하는 노조의 파업과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신음했다. ‘영국병’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대처는 이런 어수선하던 시기에 영국 정치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집권했다. 

대처리즘 혹은 대처혁명 

대처는 집권하자마자 남성 정치가들도 손 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영국병에 무자비하게 매스를 들이댔다. 우선 긴축재정 정책을 펼치고 최고세율과 기본세율을 동시에 인하했으며 세금비중을 직접세에서 간접세로 이동시켰다. 대처 집권 시기 부가가치세(VAT)는 8%에서 15%로 인상됐다. 고용문제의 경우 노동자와 사용자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완전고용에 대한 정부의 의무를 포기했다. 대처는 또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조의 파업과 피케팅에 대해 규제조치를 취했다. 

이 같은 정책이 순탄하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인플레는 한때 200%를 넘어섰고 실업자는 1년 만에 100만 명이나 늘어 총 실업자가 300만 명에 육박했다. 서민들이 주로 사는 지구에선 폭동이 벌어졌고 정권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어갔다. 하지만 대처는 천운을 타고난 지도자였다. 정권의 위기감이 팽배하던 시기에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침공한 것이다. 사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 영유권 주장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973년엔 영국 정부와 영유권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돌연 입장을 바꿔 1982년 4월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이 같은 행동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처했던 상황의 산물이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군부정권 출신으로 인권탄압에 깊숙이 간여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갈티에리는 국내의 불안과 정통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기가 필요했고 이에 꺼내든 카드가 바로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이었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영국은 전함 100척, 항공기 90기, 9,000명의 대병력을 투입했고 2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뒀다. 그녀는 이 전쟁을 계기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그녀는 전쟁 수행을 통해 결단력, 침착, 강직, 인내 등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들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녀의 지지율은 50%대로 급등했고 전쟁 다음해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녀는 권력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하자 거침없이 자신의 의제를 밀어붙였다. 우선 탄광업, 조선업, 철강업 등 영국 산업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전통산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이들 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견인차였었기에 대처의 조치는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개혁 드라이브는 멈출 줄 몰랐다. 그녀는 철강, 석유, 전신전화(브리티쉬 텔레콤), 항공(브리티쉬 에어웨이), 가스(브리티쉬 가스), 무기, 전력, 상하수도 등 40개에 이르는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복지제도도 대폭 축소시켰다.

대처의 거침없는 행보에 노동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전국 탄광노조는 대처의 폐광계획에 항의해 1년 넘게 파업을 벌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뤘고, 파업에 따른 모든 책임을 노조에 물었다. 그녀는 일련의 규제입법으로 아예 노조를 무력화시켰다. 이러자 노동자들은 대처를 증오했다. 

대처 이후 영국 경제는 성장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사회 안전망은 철거되다시피 했고 그 공백은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가 차지했다. 무엇보다 국가적 자랑으로 여겼던 복지국가 모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 뼈아팠다. 

퇴임 후에도 대처리즘은 여전

그녀는 1990년 11월 폴리텍스(인두세)에 대한 반발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하야를 선언했다. ‘세액은 지자체별로 정한 뒤 18세 이상의 주민 전원에게 부과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폴리텍스는 전국적인 반발을 불렀다. 보수당 내에서도 대처의 독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팽배했다. 결국 대처 시대는 1990년 11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그녀가 펼친 정책은 교의(-ism)로 승화돼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임인 존 메이저는 전임자가 미처 이루지 못한 철도 민영화를 완성시켰다. 

1997년 영국에서는 정권교체가 단행됐다. ‘제3의 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토니 블레어는 보수당을 물리치고 노동당 정권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여론의 평가는 냉정했다. 영국 언론들은 진정한 승자는 대처리즘이라고 논평했다. 블레어의 정책이 대처리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가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제3의 길’은 ‘바지 입은 대처리즘’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 

대처리즘의 영향은 본토인 영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처리즘은 세계화, 선진화, 국가경쟁력 강화 등등의 변종으로 진화하며 세계 각국에 이식됐다. 우리나라 역시 대처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대량 해고 사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등 한국 노동계의 현안은 대처리즘이 이식된 데 따른 결과였다. 

대처의 장례식은 한국 시간으로 4월17일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에서 엄수됐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길은 집권기 때만큼이나 순탄치 못했다. 일부 시민들은 ‘부끄러움 가운데 잠들라(Rest in Peace)’는 격문이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런던의 명소인 트라팔가 광장엔 그녀의 죽음을 환호하는 시민들로 넘쳐났다. 영국 출신으로 ‘랜드 앤 프리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서 민초들이 겪는 아픔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했던 켄 로치 감독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그는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경매에 올려 가장 싼 가격의 장례업체에 맡기자. 그게 그녀가 원했던 방식이니까”라면서 대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마거릿 대처만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벤자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글래드스톤, 윈스턴 처칠 등 당대 최고의 남성 정치가도 이뤄내지 못한 역대 최장기 집권기록을 세우며 영국 경제를 현대화시킨 공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의 기회를 빼앗고 무한 경쟁으로 내몬 과오는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대처리즘의 맹점과 한계는 대처의 정책에 힘입어 부유해진 사람들 보다 당장의 생계마저 위협받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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