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일대사건

1960년 4월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대학별로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외침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불을 지펴 모두 거리로 나와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했다. 이들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정권 수립을 요구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가 이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8.18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들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4월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0~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대가 경무대로 몰려가자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차별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흥분한 시위 군중은 경찰 지프차를 빼앗아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시위는 부산, 광주, 인천, 청주 등 전국에서 이어졌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5시부터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진압을 감행했다. 밤 10시쯤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지만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만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25일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라며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시위가 거세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면서 혼란한 시국이 가라앉았다. 같은 해 6월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1970년 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 4월22일 한파피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한다.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농촌을 재건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처음에는 지붕 고치기, 마을길 정비 등 농촌 주거환경 개선과 영농기반 조성사업에 초점을 맞췄다. 이듬해인 1971년부터 도시를 아우르는 전국 모든 지역으로 확대된 이 운동은 생활태도 혁신과 환경개선, 소득증대를 통한 근대화를 목표로 전개된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자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경제성장과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닌 관 주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80년대 들어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지만, 방만한 운영 등 여러 폐단이 드러나면서 새마을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한다. 

새마을운동은 1969년의 3선 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진행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본격적 전개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때문에 점차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는 상황을 농민과 서민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체계하의 농촌을 단기간 내에 현대적인 것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했다는 점이 특기할 성과라 할 것이다.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새마을운동은 대통령 박정희의 철저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새마을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사와 한국갤럽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공동실시한 ‘대한민국 50년의 위업’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896년 4월6일]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1896년 4월6일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고대 올림픽의 이상을 계승한 첫 번째 근대 올림픽으로, 393년 제293회 대회 이후 1,500년 만에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 있는 아테네에서 10일간 개최되었다. 

육상, 사이클, 수영, 체조, 역도, 레슬링, 펜싱, 사격, 테니스, 마라톤 등 43개의 세부종목을 14개국 241명의 선수들이 10일 동안 힘과 기술을 겨뤘고, 판아테나익 스타디움에 운집한 6만여 명의 관중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환호했다. 대회 개막 첫 경기는 100m 달리기 예선부터 시작되었다. 트랙 경기는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으로 실시되었고, 200m육상경기는 새 트랙의 코너가 너무 뾰족해서 안전상 취소되었다. 수영경기의 경우, 해안까지 되돌아올 거리를 짐작할 출발자와 함께,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에서 경기를 치렀다. 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옛 그리스의 영광을 찬양하여 종목으로 채택한 마라톤으로 2시간 58분으로 우승한 그리스의 목동 출신 S.루이스는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만 인정한 것과 달리 각 경기의 1·2위에게 시상이 되었는데, 우승자에게는 상장·은메달과 함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고 2위 선수에게는 상장·동메달·월계수관이 수여되었다. 모든 상은 대회 마지막 날인 4월15일에 그리스왕 게오르기오스 1세가 수여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11개의 미국이 차지했고, 그리스(금메달 8개)·독일(7개)·프랑스(5개)·영국(3개)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참가국은 개최국 그리스를 포함하여 오스트레일리아·오스트리아·불가리아·칠레·덴마크·독일·프랑스·그리스·영국·스웨덴·스위스·헝가리·미국으로 대부분 유럽 국가이며, 쿠베르탱을 불신한 네덜란드와 올림픽 대회 자체를 비난한 벨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또 1895년 말까지도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아 실제 참가국이 14개국에 불과했고, 대회규모도 축소되었다.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설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텡(Pierre de Coubertin, 1863~2937) 남작의 공이 컸다. 당초 그의 의도는 보불전쟁(1870~1871)에 패해,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아울러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제2회 대회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고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1960년 4월11일] 김주열 시신 발견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실종 한 달 후인 1960년 4월11일 발견됐다. 김 군의 시신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김 군의 눈에 박힌 체루탄은 직경 5㎝, 길이 20㎝에 탄피는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고 고리 부분에는 프로펠러가 달린 미제 고성능 원거리 최루탄으로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나 1956년 용지초등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 졸업 후 남원 금지중학교를 거쳐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1960년 3월,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참가 후에 실종되었다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그의 죽음과 참혹한 시체의 발견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 날 밤 3만여 명의 시위대는 시청과 경찰서, 그리고 눈에 보이는 파출소마다 습격해 기물을 파괴했다. 정부 여당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개인의 집까지도 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 여당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개인의 집까지도 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15만 명에 이르렀다. 시위는 4월13일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묘는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국립 3.15 민주묘지에 있다. 실묘는 그의 고향인 전북 남원시 금지면에 있다. 사후 김주열을 기리는 범국민장이 50년 만인 2010년 4월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거행되었다.

[1926년 4월25일] 조선 마지막 왕 순종 타계 

조선의 제 27대 왕(재위 1907~1910)이자 최후의 왕 순종의 이름은 척(拓)이며 고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이며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다. 

1875년(고종 12) 2월 세자가 되었으며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됐다. 1907년(융희 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즉위하였다. 같은 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8월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했으며,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했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曾? 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해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했다. 1910년 8월29일 국권이 피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순종은 1926년 4월25일 창덕궁에서 타계했으며, 능은 유릉(裕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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