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콘클라베 당시 유력 후보였다가 8년 만에 교황 자리 올라

최근 천주교계에 사상 최초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지난 2월, 교황인 베네틱토 16세가 600년 만에 스스로 교황 자리에서 물러난데 이어 새로운 교황으로 사상 첫 비유럽권 출신이 선출됐다. 추기경단은 3월12일 교황선출 투표를 실시했고, 교황 선출 실패를 의미하는 검은 연기가 한 차례 피어올랐다가 이틀 만에 드디어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생 기도와 고행 통해 봉사하는 생활 실천

3월12일 오전 세계의 눈이 바티칸 성당으로 쏠렸다. 이날 세계 48개국의 80세 미만 추기경 115명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미사에서 콘클라베 공식 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동안 다섯 차례의 투표 끝에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됐다.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을 제266대 교황의 즉위명은 프란치스코. 그는 세계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라틴아메리카 중에서도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현대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에 2005년 콘클라베에서도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베네딕토 16세에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8년 만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드디어 교황 자리에 오르게 됐다. 

첫 비유럽권 출신 교황 탄생이라는 것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청빈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의 지난 삶에 관심이 집중됐다.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 가정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1세는 원래 화학 기술자가 되려고 했으나 스물두 살이던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30대 시절 수도사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사목 활동을 했다. 1980년에는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탁됐고,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에 올랐다.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은 2001년이다.

평생 기도와 고행을 통해 봉사하는 생활을 실천해온 그는 대주교 직에 오른 뒤에도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 않았으며, 대주교 관저 대신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빈자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1세의 성향은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리에 따라 동성결혼, 낙태, 피임 등을 비판하는 것은 전임 베네딕토 16세와 비슷한 성향이지만 사회적인 문제에서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온 그는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2010년 동성결혼 합법화와 낙태수술 허용 법안을 마련하려하자 대선과 총선에서 야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혀 갈등을 빚었고, 지난해에는 “아르헨티나가 전체주의와 부패에 빠져 있다”며 정치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19일 거행된 즉위 미사에는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렸다. 교황은 이날 즉위 미사를 통해 “환경을 존중하고, 아이와 노인, 가난한 사람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고 보호해야 한다”며 ‘보호자의 소명’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에는 전임 교황과 현직 교황이 만나 나란히 기도했다. 전·현직 교황의 만남은 600년 만이었다.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별장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신임 교황은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과 만나 미사를 마친 뒤 전임 교황의 도서실에서 40~45분간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국제 정치 ‘풍운아’ 차베스 대통령 끝내 사망

암투병 중이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3월5일 끝내 별세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암투병 중이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5일 오후 4시25분(현지시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14년 동안 장기집권한 차베스 대통령은 최근 2년 동안 암 치료를 받아 왔다. 지난해 12월 암 수술을 받은 이후 취임식도 연기한 채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동안 쿠바에 머물며 암 치료를 받아온 차베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2월15일. 베네수엘라 정부가 딸과 함께 쿠바의 한 병원 침상에서 찍은 차베스의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사흘 후 전격 귀국했고, 이를 두고 각종 추축과 관측들이 난무했지만 결국 보름 만에 사망했다.

199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차베스는 1999년 베네수엘라 최연소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 헌법 개정을 통해 2000년 재선된 차베스는 2002년 쿠데타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남은 뒤 한층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재임 중 차베스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정부 재정이 늘어나자 이를 토대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해 실업률을 대폭 낮추기도 했다. 집권 초기 50% 선을 넘나들던 실업률을 2011년에 32%까지 끌어내렸다. 차베스는 대표적인 반미 지도자이기도 했다. UN 총회 연설에서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등 반대 세력과 대립각을 세웠다. 

차베스에 대한 평가는 양분됐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자주와 고립으로 엇갈렸고, 자국 정치에서는 빈민 구제자와 독재자라는 평가로 나뉘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던 그는 국제 정치사에서 풍운아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망이 공식 발표되자 지지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차베스는 살아 있다’며 눈물 섞인 구호를 외쳤다.

차베스의 장례식은 8일 엄수됐다. 수도 카라카스 군사학교 예배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전 세계 50여 개 국에서 온 정상과 대표단, 현지 외교사절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순서대로 나와 관을 덮은 국기를 어루만지거나 가벼운 키스와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차베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러한 가운데 대통령 재선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6년 임기의 대통령이 취임 후 4년 내에 사망할 경우 의회의장 또는 부통령이 대통령 대행을 맡고 30일 내에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조만간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전망이다. 차베스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한 마두로 부통령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 지난 대선에서 차베스와 경쟁했던 엔리케 카프릴레스 주지사, 디오스다도 카베요 의회의장 역시 대통령직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쇄 폭탄 테러로 얼룩진 이라크전 발발 10주년

이라크전 발발 10주년을 하루 앞둔 3월19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등지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 최소 56명이 숨지고 200명 이상이 다쳤다. 지난해 9월9일 연쇄 테러 이후 하루 사망자 수로는 최대 규모다.

해외 언론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바그다드 마쉬탈 구역의 유명 식당 밖에서 폭탄이 터져 4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쳤으며, 몇 분 뒤에는 신시가지에서 도로변에 매설돼 있던 폭탄이 폭발해 2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했다. 시아파가 밀집해 있는 사드르 시에서도 미니버스 차체 밑에 장착된 폭탄이 터져 3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이외에도 차량 폭발 사고로 7명이 숨지고 2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특별경계구역인 그린존 주출입구에서도 폭탄이 터졌고, 바그다드 동부 카히라 구역의 노동사회부 청사 인근에서도 차량 폭탄테러가 발생,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날 연쇄테러는 오전 8시부터 약 2시간 동안 바그다드와 주변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최소 20차례의 폭발과 수차례의 공격이 벌어졌다고 해외 언론은 전했다. 

이러한 가운데 알카에다 무장단체의 이라크 연계조직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람 국가 이라크’라는 이름의 이 조직은 성명을 통해 “이는 앞으로 계속될 복수의 시작”이라고 위협했다.

이라크에서는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낸 2006〜2007년을 정점으로 점차 폭력과 테러 사건이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2011년 말 미군 철수 이후 시아파와 수니파 간 갈등이 다시 심화하면서 테러가 빈발해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고 치안도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특히 지난해 12월 말 이후 수니파 주민들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가 매주 금요일마다 이어지는 등 종파 분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에 이라크 정부는 이날 각료회의를 통해 내달 20일로 예정된 지방선거를 수니파 주민의 시위가 이어지는 서부 안바르와 서북부 네나바 등 2개 주에서만 최대 6개월까지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올리가르히 원조 베레조프스키 사망, 자살 가능성 대두

한때 러시아 최대 신흥재벌로 명성을 날렸던 사업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3월23일 사망했다.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그의 사망을 두고 자세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파산에 시달리다 자살했을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베레조프스키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정경유착 등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쌓은 신흥갑부들을 일컫는 ‘올리가르히’의 원조로 통한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정부의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베레조프스키는 당시 보리스 옐친 대통령 및 그 측근들과의 유착관계를 이용해 항공·자원 분야의 거대 기업과 TV 방송사, 신문사 등 언론까지 소유했으며, 옐친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대며 막후실세로 군림했다. 그러던 그가 2000년 1기 집권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의 올리가르히 척결 과정에서 쫓겨나 2001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정치적 망명 생활을 해왔다. 런던 망명 이후에도 그는 푸틴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크렘린의 표적이 돼왔다.

지난해 중반 그는 또 다른 올리가르히 로만 아브라모비치와의 55억 달러(약 6조 1,000억 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해 심각한 물질적,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수천만 달러의 변호인 수임료 지급을 위해 소장해 오던 미술품과 1927년산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팔고, 런던 시내의 사무실을 폐쇄하는가 하면 일부 저택을 매각하고 직원을 해고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일부에선 베레조프스키가 소송 패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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