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빈곤층, 장애인, 불법체류자 등 사회적 약자 대책 시급
서울대 의료관리학 교실의 연구 결과에서 나타난 한국 장애인의 의료 현실은 사실상 ‘방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장애인들이 낮은 소득과 높은 진료비 부담, 정부의 무관심 등으로 재활을 포기한 채 서서히 저소득 빈곤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빈곤층과 장애인뿐만 아니라 불법체류자 2세들 역시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고 있다.

연구결과를 보면, 먼저 많은 장애인들은 소득수준이 낮은 데도 불구하고 높은 진료비를 부담하고 있다. 건강 상태가 나쁜 것은 물론이다.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전체 인구의 총 진료비는 약 15조3천억원. 이 가운데 장애인의 총 진료비는 1조4천억원이다. 전체 인구 대비 3%의 장애인이 의료비는 전체의 9.2%를 쓰고 있다. 1인당 총 진료비 구성에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견줘, 총 진료비가 3.9배나 많은 걸로 나타났다.
장애인은 특히 입원비가 비장애인보다 많았다. 이는 장애인이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한 질병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한 때에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해,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악화되는 현실이 더 큰 요인이라고 연구팀은 분석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외래이용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이 외래를 통한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많은 장애인들이 건강검진이 필요한데도 이를 받고 있지 않거나,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4년 기준으로 볼 때, 비장애인의 건강검진 1차 수검률은 48.29%인데, 장애인은 40.90%였다. 건강검진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건강보험 직장가입자를 분석한 결과, 장애인들은 대체로 소득수준이 낮은 취약계층임이 확인됐다. 장애인들이 가장 많이 겪는 질환은 고혈압이며, 다음으로는 당뇨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일반 환자들이 가장 많은 질환은 감기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지체·뇌병변·시각·청각장애자 311명을 표본으로 뽑아 이들의 실태를 정밀 진단해, 전체의 61.1%가 의학적 처치 및 수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적절한 처치를 받고 있는 이들은 33.2%에 그쳤다. 시각장애는 방치하면 지속적으로 악화할 수 있고, 지체 및 뇌병변의 경우도 처치가 적절히 없으면 장애가 굳어지고 더 나빠진다.
더욱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보장구를 살펴보니 60.6%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각장애의 경우 보청기 보유율은 82.9%로 높았으나 성능이 적절한 것은 21.4%에 그쳤다. 더욱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는 지원금(보장구 기준금액 80%까지 보장)으로 보장구를 구입한 비율은 23.5%에 지나지 않았다. 정보 부족으로 이런 지원정책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재활치료를 받는 이는 단 10.4%에 그쳐 그 심각성을 더했다. 1년에 1회 이상 정기진료를 받는 비율도 전체의 33.9%에 불과했다. 공식 통계상 2003년 말 국내 장애인은 146만여명. 이 가운데 지체·뇌병변·시각·청각장애자가 전체 장애인의 82.5%에 이른다.




불법체류자 문제도 심각
지난해 7월 호흡기 장애를 갖고 태어난 다니엘라는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출생 직후부터 격한 기침으로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던 다니엘라는 ‘선천성 성문하협착증’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이주한 다니엘라 부모에게 수술비 3백만원은 큰 부담이었지만 안산의 직장동료와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라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하루 10만원 정도의 입원비와 치료비를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병원은 입원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퇴원에 반대했지만 다니엘라 부모는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측은 집에서도 산소 호흡기를 사용할 것과 계속 통원치료를 받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산소호흡기는 제일 싼 것이 30만원 이상이다. 다니엘라 부모의 월 60만원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산소호흡기 없이 집에서 생활하던 다니엘라는 지난해 12월 끝내 숨졌다. 어머니는 “딸이 조용해서 오랜만에 곤히 자고 있는 줄로 알았다”면서 “너무 너무 짧게 살다가게 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인 마히야(40)는 돈 때문에 갓 태어난 딸을 퇴원시켰다. 간과 심장이 좋지 않아 출생 직후부터 일주일간 입원을 했는데 병원비만 1백60만원이 나왔다. 한달 수입 1백만원으로는 입원을 계속할 수 없어 퇴원한 뒤 경기 마석가구단지에서 구리의 종합병원까지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통원치료비까지 합쳐 2백만원이 들었다”면서 “숙련공 대접을 받아 그나마 월급이 많긴 하지만 병원비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푸념했다.
몽골인 도와(35)는 딸 한다(12)가 몽골에서 한 편도선 수술의 후유증으로 목이 부어 있지만 병원에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퇴근을 빨리 해도 오후 7시30분, 문을 연 병원이 거의 없다. 점심시간 이용은 한국인 상사의 눈치가 보여 말도 꺼내지 못한다. 도와는 “병원비가 얼마나 비싼지 모르겠고 병원에 갔다가 불법 체류자 신분이 들통날까봐 딸에게 참으라고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불법 체류자 2세들’이 높은 병원 문턱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시행된 공공보건의료법령에 따라 국내 이주노동자는 불법 체류자 여부와 관계없이 적십자병원 등 전국 40개 지정병원에서 1인당 최고 5백만원 한도 내에서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 본인만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 그 배우자와 2세는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불법 체류자 2세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것이다.
불체자 본인의 의료지원을 하는 이 제도 역시 불체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제도 시행 8개월 사이 얼마나 많은 불체자들이 혜택을 보았는지 통계도 없다.
많은 불체자들은 기자의 질문에 “그런 제도가 있느냐. 처음 듣는 얘기”라는 반응을 보였다.
불체자들은 그보다 스스로 의료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한국이주노동자건강협회라는 단체를 결성, 매월 6,000원씩 받아 기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의료지원을 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공동부조인 셈이다. 전체 회원 1만7천명의 90%가 불체자라고 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공공보건의료법의 혜택을 볼 수 없는 불체자 2세는 결국 부모가 가입해있는 이 협회를 통해 의료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내 거주 불법 체류자 규모가 20만명(법무부 2004년 통계)임을 감안하면 협회를 이용하는 불체자는 10%에도 못미치는 실정이다.
게다가 실제 병·의원을 이용할 때 이주노동자가 의료비를 먼저 계산한 뒤 건강협회를 통해 치료비의 일정 부분을 30~60일 이후에 정산하는 방식이어서 응급상황을 제외하고는 선지급할 목돈이 필요하다. 그나마 한국정부의 불법 체류 노동자 단속이 강화되면서 회원수와 회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이주노동자건강협회 관계자는 “부모의 체류자격 때문에 자녀의 건강권이 박탈당해서는 안된다”면서 “자녀에게 임시적으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줘 의료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노동자 무료진료를 하는 한 의사는 “무료진료소는 임시방편일 뿐, 병원 문턱을 낮춰 일상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지원 빈곤층 25%가 노인
정부의 의료비 지원혜택을 받는 빈곤층 가운데 4명 중 1명은 65세 이상 노인으로, 건강보험 수급권자 중 노인비율에 비해 3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해 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 차상위계층 등 의료급여 수급권자 현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이 45만2,480명으로, 전체 수급권자 176만1,565명의 25.7%를 차지했다. 이는 2004년보다 3만7,000명이 증가한 수치로, 건강보험의 노인 수급권자 비율 8.3%에 비해 3.1배가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따라 질병 이용률이 높은 65세 이상 노인의 진료비는 1조2,173억원으로 총 의료급여 비용의 37.6%를 차지했다. 이 또한 2004년보다 0.4%포인트 증가했다. 의료급여 총 진료비용은 3조2372억원으로 2004년 보다 23.7% 증가했으며, 심사건수도 4,852만건으로 전년보다 51.6%나 늘었다. 의료급여 수급권자 1인당 연간 의료기관 이용 일수는 2004년보다 0.4일 늘어난 56.5일, 1인당 연평균 진료비는 전년에 비해 7.39%가 증가한 183만7,668원으로 집계됐다.
심평원은 이처럼 진료비가 급증한 데는 차상위계층 등에 대한 의료급여 확대로 수급권자가 23만3,000명이 증가하고, 노인수급권자 및 희귀난치성 질환자가 늘어났기 때문으로 분석했다.심사건수가 급증한 배경으로는 약국의 약제비 명세서 작성·청구 방법이 종전 월단위에서 방문일자별 작성으로 변경된 게 주 이유라고 심평원은 설명했다. 또한 의료급여 수급권자 가운데 본인부담액 전액을 지원받는 자활능력 비보유자(1종)는 56.6%(99만6,000명)이지만 이들에게 들어간 진료비는 전체의 80.6%(2조6,104억원)를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심평원 관계자는 "올해는 파킨슨병 등 희귀질환에 대한 보험적용 혜택이 늘어나는 등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이 확대돼 의료급여비 증가율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 된다"고 말했다.


민간 건강보험상품 출시?
한편 빠르면 3월부터 건강보험의 사각지대를 메워줄 실손형 민간보험이 본격 시판될 것으로 보여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보장률이 60%대에 불과한 건보의 골격을 흔들 정도는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실손형 민간보험은 매달 일정액의 보험료를 내는 대신 건보가 적용되지 않는 진료비, 즉 환자 본인 부담액의 70%를 지급받는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회사의 동일 상품에 가입해도 한 곳에서만 보험금이 지급된다. 복지부는 이 같은 방식이 기존 건보에 대해 보완적 기능을 하는 측면 등을 감안, 굳이 반대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민간보험을 전면 도입, 국민들에게 건보와 민간보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대체형 민간보험 시행에는 강력 반대하고 있다. 건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 일각에서 보험 및 의료 산업 활성화 등을 위해 대체형 민간보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손형 민감보험이 도입될 경우 환자 본인 부담액 감소에 따른 진료 남발과 의료 낭비, 건보재정 지출 증대 등의 부작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병원에 한 번 가면 될 것을 두 번, 세 번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부 보험사는 이 같은 점 때문에 판매 계획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 보험료를 납부할 능력이 없는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의료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이 때문에 의료시민단체들은 건보 보장률이 80% 수준이 될 때까지는 실손형 민간보험 도입을 늦춰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간 보험사들은 건보 가입자들의 개인 질병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복지부 등은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국가인권위도 건보공단의 질병정보 제공은 국민의 기본권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보류를 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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