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여왕’ 현정화의 못 다한 탁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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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여왕’ 현정화의 못 다한 탁구이야기
  • 편집국
  • 승인 2017.06.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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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단일팀’ 감동 이어 남북교류에 협력하고파

 

   
▲ 한국 탁구의 전성기를 오롯이 함께한 현정화 감독. 한국 탁구선수 중 유일하게 세계를 제패한 그랜드슬래머다.
 
‘레전드’라 함은 모름지기 시대를 초월해 회자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특히나 스포츠 스타라면 전 국민을 열광케 하는 감동적인 경기 한두 개쯤은 당연할 것이다. 떠오르는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면 제각기 다를 수 있지만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인물은 몇 안 된다. 그중 본지가 최고로 꼽은 인물은 다름 아닌 ‘현정화’ 감독이다. 한국 탁구계의 빛났던 전성기를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탁구 역정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본지는 이 코너를 릴레이인터뷰 방식으로 진행해 매달 궁금한 스포츠스타의 전성기와 근황을 소개할 계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와 극적 전개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영화 ‘코리아’도 마찬가지다.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단일팀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분단 후 처음으로 하나가 된 남·북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회를 40여 일 남겨두고 극적으로 협의된 남북단일팀은 선수 간 호흡은 고사하고 연습 자체만으로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의 저력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당시 세계 랭킹 3위의 리분희(북한)와 9위의 현정화(남한)가 함께한 ‘왼손잡이’ 복식조는 예선 5경기를 전승하며 승승장구한다. 16강전에서 덴마크를, 8강전에서 러시아를, 준결승전에서 헝가리를 꺾은 현정화-리분희 조는 결승에 진출한다. 상대는 세계 최고의 탁구 강국인 중국이었다.
 
당시 단일팀의 주전이었던 현정화-리분희 조는 선수층이 두터운 중국에 비해 체력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특히 단식과 복식을 모두 뛴 현 감독의 경우는 체력 소모가 한계치에 도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선수들의 분투는 눈부셨다. 단체전 세트스코어 2-2, 손에 땀을 쥐는 승부가 이어졌다. 민단과 총련 응원단이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장내를 가득 메우면서 그야말로 한반도는 하나가 되어 갔다. 단체전 마지막 경기인 유순복-가오준 단식에 모든 운명이 달렸다. 강력한 백핸드 드라이브로 1세트를 따낸 유순복은 지고 있던 2세트도 막판 추격으로 내리 3점을 따면서 마침내 승전보를 울렸다.
 
승리가 확정되던 순간 선수들과 감독, 임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더 할 수 없이 냉정한 승부사였던 현 감독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 찡한 울림의 순간이었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탁구를 하면서 처음 울었다. 그전에는 개인단식 우승이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가 가장 영광스러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시간이 더 흐른 지금에 와서 보면 남북단일팀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때는 ‘통일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남북교류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힘을 보태고 싶다.”
 
올림픽 겨냥한 ‘전략적 복식조’, 버텨야 했던 왕관의 무게
 
현 감독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5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등을 하면서부터다. 선수촌에 입촌하자마자 현 감독은 3년 뒤에 있을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비밀병기(?)로 조련되기 시작했다. ‘탁구의 여왕’으로 등극하기까지 견뎌야했던 왕관의 무게는 혹독했다. ‘D-365’라고 써진 달력판을 하루하루 직접 손으로 넘겨가며 훈련에 돌입했다. 국내에서 대회가 있는 날은 하루 전에 훈련원을 나와서 시합하고, 끝나면 바로 또 훈련원으로 들어가는 고된 일상의 반복이었다.
 
“85년 9월부터 꼬박 3년을 태릉선수촌과 탁구 국가대표를 위한 탁구훈련원에서 살았다. 그렇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했다. 국내 대회가 있는 날은 하루 전에 훈련원에서 나와서 시합하고, 끝나면 집으로 못 가고 다시 훈련원으로 들어가 연습하는 생활을 3년간 반복했다.”
 
   
▲ 1987년 제3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양영자 선수와 함께한 여자복식에서 우승한 현정화 감독 모습.
 
그러나 이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현정화가 있다고 말한다. 이 3년 동안 현 감독은 5년 선배였던 양영자 선수와 조를 이뤄 호흡을 맞췄다. 일종의 전략적 복식조였다. 당시 양영자 선수는 1983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단식에서 준우승한 정상급의 선수였다. 농담도 잘 안하고 훈련에만 매진하는 대선배와의 연습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선배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롯이 현 감독의 실력으로 축적되었다.
 
“양영자 선배와는 환상의 복식조였다. 탁구는 한 번 치고, 한 번 움직이는 경기다. 같은 오른손잡이는 돌아야 하는데, 우리는 선배는 오른손잡이고 나는 왼손잡이라 돌 필요가 없었다. 또 선배는 탁구대에 거리를 두고 치는 드라이브 전형이고 나는 탁구대에 붙어서 때리는 전진속공형이라 정말 잘 맞는 조합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워낙 잘 치는 선수였기 때문에 나는 항상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면서 연습했다. 그렇게 3년을 쳤으니 얼마나 실력이 늘었겠나. 1년6개월 만에 선배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선배가 은퇴를 할 때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에서의 우승도 양영자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현 감독은 말한다. 복식은 말할 것도 없고, 단체전 우승도 1명만 뛰어나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 탁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던 역대 우승 신화는 모두 당대를 호령했던 뛰어난 복식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에리사-정현숙, 양영자-현정화로 이어지는 ‘환상의 복식조’ 계보가 한국 여자탁구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남북단일팀의 주전인 리분희-현정화 조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이 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은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때 복식으로 호흡을 많이 맞췄다. 그전까지는 국내에서 탁구가 그리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니었는데, 86아시안게임 때 양 선배와 함께한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면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88올림픽에서 또 금메달을 따니 국민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남북단일팀 이슈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소식이 전해지면서 탁구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 여자탁구의 전성기가 현 감독이 선수생활을 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 감독이 은퇴한 이후 한국 여자탁구는 아직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계를 제패한 ‘그랜드슬래머’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했던 현 감독은 탁구에 입문한 이후 줄곧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달기 시작한 국가대표란 타이틀도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에게 탁구는 일종의 의리 같은 것이었고,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은 국민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고투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자리가 항상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모든 탁구선수들은 자기만의 그립감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라켓을 똑같이 잡는데, 어떤 때는 뻑뻑한 날이 있고, 어떤 때는 부드러운 날이 있다. 또 어떤 날은 한없이 무겁고, 어떤 날은 한없이 가볍다. 스윙도 어떤 날은 잘 돌아가는 날이 있고, 어떤 날은 안 돌아가는 날이 있다. 그립감이 안 좋은 날은 영락없이 탁구가 힘들다. 그래서 중요한 시합이 있는 날은 자다가도 일어나 라켓을 잡아본다. 어떤 날은 몇 번씩 일어나 잡아보고 자고, 잡아보고 자고 한 적도 있다. 또 어떤 때는 구질이 좋아야 하니까 자다가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스윙 연습을 한 적도 있다.”
 
이런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직후였다. 단식과 복식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한 현정화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극심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잠시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휴식을 취했지만 알 수 없는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부상도 오고, 신경성 위염이 생겨서 먹으면 자꾸 체했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져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쉬고 있던 그를 일으켜 다시 불러들인 건 당시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던 이유성 감독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훈련에 매진했다.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 우승까지 거머쥐었지만 선수 시절 내내 탁월한 성적을 냈던 단식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탁구선수로서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어야한다는 심정이었지, 우승할 실력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실력이 없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이기려고 노력한 것이지 중국 선수들을 다 이길 만큼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탁구선수로서 모름지기 세계선수권 단식 우승은 해야 여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세계 랭킹 10위까지는 거의 중국 선수들이었다. 그러니까 세계선수권에 나가면 통상 10명 이상의 중국 선수들과 겨뤄야 한다. 32강부터는 거의 중국 선수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정작 단식 우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맞붙은 루마니아의 오틸리아 바데스쿠였다. 모든 경기가 그렇듯 선수들은 상대방을 파악하고, 이기기 위해 전략을 짜고 기술을 연마한다. 특히 탁구는 선수마다 습관적으로 잘 치는 코스가 있어 이것이 먹힐 때는 경기 운영이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계속 져서 갔다. 1세트 지고, 2세트 이기고, 3세트는 20-15 포인트에서 추격해 22-20으로 역전하고, 4세트 지고, 그리고 5세트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기 시작했다. 5포인트를 계속 져서 가는데, 17-13까지 갔다. 상대가 나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구질을 바꿔가며 때리는데도 공이 넘어왔다. 정말 질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 지금 치고 있는 이 한 포인트, 거기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끝까지 내 페이스대로 묵묵히 쳐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18-17까지 따라잡았고, 듀스 가서 역전승했다. 뜨거운 승리의 감격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기진맥진해 주저앉았다.”
 
현 감독은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우승하며 한국 최초로 세계 탁구를 제패한 그랜드슬래머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은퇴를 했고, 지금까지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초창기에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 때문에 원형탈모가 3개나 생길 정도로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
 
   
▲ 탁구를 통한 사회기여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틈틈이 탁구 동호회를 찾아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한다. 이런 활동이 바탕이 되어 ‘현정화스포츠클럽’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서 승부보다는 탁구를 통한 사회기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현정화스포츠클럽’ 사단법인도 설립했다. 대한체육회가 올해부터 실시하는 ‘스포츠클럽 스타 서포터즈’와도 맥을 같이하는 사단법인 ‘현정화스포츠클럽’은 탁구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종목에도 재능 있는 어린이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현 감독은 이를 두고 그동안 받은 국민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리하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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