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과 판매 위탁, 경쟁사보다 낮은 비용으로 델 누르고 노트북 2위

지난 6월 대만네엇 열린 ‘컴퓨텍스2012’는 차세대 운영체제(OS)인 ‘윈도우8’과 어울릴만한 제품을 찾기 위한 전세계 PC업체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무대였다. 여기서 대만 컴퓨터업체인에이서(Acer)는 27인치 대형 화면을 가진 일체형 PC부터 10인치 태블릿 PC까지 다양한 크기의 윈도우8제품을 선보였다. 특히 에이서의 2세대 울트라북 ‘에이서아스파이어S7’시리즈는 3세대 인텔 코아 아이비 브릿지 프로세서가 탑재됐고, 두께는 12.5mm에 불과해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컴퓨터 산업은 빠르게 진화한다. 그 엄청난 속도 때문에 생산돼 목적지에 도달하는 동안 새로운 제품이 출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만의 사업가 스탠 시(stan shih)는 여기에서 사업 전략 아이디어를 얻었다. PC가 목적지까지 가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면 일단 부품을 먼저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 제품을 완벽하게 제조해 배송하는 것보다 부품 상태로 배송 지역에 보낸 후 그 곳에서 필요에 따라 제조하고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한 스탠 시는 이러한 방식으로 대만의 에이서 컴퓨터를 세계 시장에 알렸다.
스탠 시가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 회사 이름은 ‘MultitechInternational Corporation’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에는 이 길고 복잡한 이름이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 2년여의 고민 끝에 ‘Acer’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 라틴어로sharp, energetic, capable을 뜻을 담고 있다. 사명 변경을 시작으로 스탠 시는 곧바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제조 파트와 판매 파트가 나뉘고, 권역별·국가별로 나뉜 책임자들은 권한을 부여받아 자체적으로 판매 전략을 짜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에 있는 Acer America는 형태로는 에이서의 지사 중 하나지만 마케팅 부사장인 Williamson이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다. 불필요하게 소요되는 의사결정 과정의 단계를 줄여 보다 신속하게 판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대의 낮은 마진율로 가격 경쟁력 우위
원래 에이서는 PC의 메인보드 등 부품을 만드는 부품 회사였다. 그러나 1997년 미국 반도체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츠로부터 노트북컴퓨터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PC완제 품 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PC 시장은 내리막 길이었다. 성공한 회사는 동남아에 공장을 지어 생산원가를 낮춘 델(Dell)뿐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경쟁사보다 훨씬 저렴한 에이서의 등장은 소비자들에게 희소식이었다. 에이서는 2002년까지 생산시설을 분사했다. 그리고 생산은 분사한 자회사 또는 중국의 위탁업체에 맡겼다. 판매도 외부의 유통업체에 맡겼다. 이렇게 생산과 판매를 외부에 맡기며 군더더기를 없앤 덕분에 에이서는 경쟁사보다 훨씬 낮은 비용을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디자인과 설계, 브랜드 홍보는 전적으로 본사가 책임졌다. 또한 에이서는 데스트탑 대신 노트북에 올인하는 승부수도 던졌다. 비록 전체 생산량은 HP나 델에 못 미쳤지만 노트북 생산량을 그들만큼 늘려 부품 조달 비용을 낮추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러한 전략으로 에이서는 가격 경쟁력 면에서 앞섰다. 낮은 마진 덕분이었다. HP와 델이 제품 당 4% 이상의 마진을 남기는 반면 에이서는 2%대 후반의 낮은 마진율을 적용했다. 이에 에이서의 노트북은 2010년에 전세계 노트북 시장에서 HP에 이어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했다.

태블릿PC 문제로 갈등, 지오프랑코 란치 경질
에이서는 대만을 대표하는 다국적 IT 기업이다. 주력 제품인 노트북뿐 아니라 태블릿PC, 모니터, 빔프로젝터 등 다양한 제품군을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 게이트웨이(Gateway), 이머신즈(e-machines) 등 자회사들도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에이오픈(Aopen)과 벤큐(BenQ)는 에이서의 품에서 독립시키기도 했다. 에이서 그룹의 J.T. 왕 회장은 2008년 그룹 CEO로 취임해 2010년 19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이러한 성과로 그해 타임지가 선정하는‘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81년 엔지니어로 에이서에 일하기 시작한 왕 회장은 1990년 영업 및 마케팅 부문 사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그룹의 IT 제품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에이서의 사장으로 임명됐고, 2005년에는 회장 겸 CEO의 자리에 올라 2008년 6월까지 맡았다. 그리고 이후 그룹의 CEO직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1997년부터 10여 년간 에이서에 몸담았던 지오프랑코 란치 CEO가 에이서를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블릿PC 문제를 두고 이사회와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왕 회장이 그룹회장직과 함께 에이서 CEO를 겸임하게 됐다. 최악의 실적도 그의 경질에 한 몫 했다. 에이서는 2011년 1분기 순익이 12억 대만달러로 전년 동기(32억 9,000만 대만달러) 대비 64% 급감했다. 게다가 3분기 연속 실적감소였다. 애플의 아이패드와 삼성전자의 갤럭시 탭 등 태블릿 PC가 시장에 대거 출시되면서 노트북 수요가 급감한 탓이었다. 란치의 사임에 대해 왕 회장은 “란치는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을 이끈 주역이지만 태블릿사업 전략에서 이사회와 의견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면서 “세계시장의 변화에 맞춰 지금까지 주력인 노트북과 넷북은 물론 태블릿과 스마트폰 등 모바일 디바이스로의 선두를 노리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중순 삼성전자가 지오프랑코 란치를 영입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삼성 측에서 ‘사실무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주 무대인 유럽 경제 위기에 중국에서 돌파구 찾아 에이서는 대만기업이지만 매출의 50% 가량이 유럽, 중동, 아프리카가 차지한다. 아시아는 30% 정도 차지하고 있는 데 그 중 아시아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는 불과 5%였다. 중국 시장과 외국 시장은 시장 자체가 아예 다르지만 에이서는 그 차이와 상관없이 일관된 마케팅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한 예로, 노트북 디스플레이 카드의 경우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80%의 노트북이 종합 디스플레이 카드를 사용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이를 대신해 GPU가 일반적이다. 유럽 소비자들은 15인치와 16인치의 종합 디스플레이 카드 노트북 컴퓨터를 선호하고 여러 대의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중국 소비자들은 한 컴퓨터가 되도록 많은 기능을 동시에 갖길 원하는 심리에서 이 같은 소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에이서는 2009년 이전까지 유럽과 미국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14인치 이상의 대형화면 노트북을 중국에서도 그대로 판매하고 있었다. 에이서는 유럽시장에서 연구개발(R&D)과 철저한 유통 관리로 성장했다. 또한 현지 핵심적 유통 경로와 협력해 현지 업체가 주도하는 이윤 공유를 실현했다. 그러나 중국 유통시스템은 총대리업체, 지역대리업체, 소매업체로 이루어져 있어 유통 경로가 복잡할 뿐 아니라 중국 소비자 역시 사전에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3∼5개의 브랜드를 먼저 선택 후 매장에 직접 가서 비교해본 후에야 제품을 선택하고, 흥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중국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에이서는 2009년 중반부터 중국의 여러 도시의 목표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대규모 브랜드 의식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응답자 4명 중 1명이 에이서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세계 2위의 에이서였지만 중국에서는 그 인지도가 예상보다 훨씬 낮았다.
이를 통해 에이서는 소비자의 구매 심리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브랜드의 인지도이지 제품의 특정 기능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결과에 따라 에이서는 브랜드 이미지를 ‘믿을 수 있는 컴퓨터’로 설정하고 ‘내가 믿기 때문에 선택한다. 에이서 컴퓨터’라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다. 과거 소극적인 홍보 마케팅으로 실패를 맛봐야했던 에이서는 3년에 걸친 시장 확대 계획을 수립했고, 유통업체에게 실효성 있는 마케팅 지원을 제공했다. 그렇게 중국 소비자들에게 에이서라는 브랜드를 인지시켜 나갔다. 2010년 2월부터는 CCTV의 춘절 황금 시간대에 광고를 내보냈고, 전체 CCTV 광고 분량을 늘렸다. 또한 동시에 중국 전역의 위치한 실외 대형 전광판 광고, 지하철, 택시, 대형 건물 내부, 사이트, 간판광고에도 에이서를 노출했다. 그렇게 에이서는 중국 시장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현재 에이서는 중국 업체 폰더와 제휴를 맺고 방대한 유통망을 통해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한때 최대 시장이었던 유럽이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자 에이서는 이 적자를 중국에서 메우고 있다. 에이서의 중국 내 점유율은 전년 동기 3.5% 수준에서 18%로 상승했으며, 앞으로 연구개발 인력을 6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는 등 중국 PC시장에서 또 다른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스마트폰 점령에 주춤, 아수스와의 합병설 돌아
사실 에이서는 스마트폰이 세계 휴대폰 시장을 점령하면 서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델을 제치고 세계 2위 업체로 도약했지만 2010년에 애플이 아이패드를 선보인 후 넷북 시장이 얼어붙어 에이서는 큰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왕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PC조립생산만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 환경에 온라인 서비스 사업을 시작한 것. 이에 지난해 에이서는 미국의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개발업체인 아이지웨어(iGware)를 인수했다. 인수금액은 3억 2,000만 달러(약 3,360억 원). 이마저도 이미 늦은 출발이었지만 왕 회장은 급변하는 IT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선택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클라우드 서비스보다는 우선 하드웨어 중심의 기업구조부터 바꾸는 것이 먼저”라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최근 대만의 컴퓨터제조업체 아수스(Asus)가 에이서를 합병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양측은 이러한 소문을 부인하고 있지만 증권가에서는 “경쟁관계인 두 회사가 합쳐질 경우 세계 최대 컴퓨터제조회사가 탄생하게 된다” 면서 “아수스가 에이서를 인수할 경우 에이서의 글로벌 판매망과 브랜드파워를 이용해 태블릿 시장의 최강자인 아이패드와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하이엔드급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시장 분석에 따르면 이들이 합병할 경우 PC 시장 점유율은 18%에 이르게 된다. 이는 현재 1위인 HP를 넘어서는 비율이다. 하지만 이 둘의 동거 여부는 조금 더 지켜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