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근로자 22명의 죽음, 정부가 책임 짊어져야

▲ 2009년 5월22일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이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 조치를 단행하려 한데 따른 반작용이었다.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22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11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 가운데 일터로 돌아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시사매거진 지유석 기자

2009년 5월22일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이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 조치를 단행하려 한데 따른 반작용이었다.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22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11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 가운데 일터로 돌아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자들은 절규한다.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의 비극은 200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쌍용차는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자동차에 인수되었다가 모그룹 경영난과 자체 매출 부진으로 지난 2000년 채권단 주도의 독자경영체제로 돌입했다. 사실 이 시절은 쌍용차의 황금기였다. 2001년 '렉스턴', 2002년 '무쏘 스포츠', 2003년 '뉴 체어맨' 등 신모델을 잇달아 출시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5년 1월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의 인수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차 인수는 초기부터 잡음이 일었다. 무엇보다 기술유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 상하이자동차를 비롯한 중국의 자동차 업계는 자체 브랜드가 없었던 실정이었다. 중국 자동차 업계는 미국의 GM, 독일의 폴크스바겐, 일본의 혼다 등 해외 주요 자동차 브랜드의 합자·합작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노조는 상하이자동차측이 핵심기술을 빼내 자체 브랜드를 갖고자 쌍용차 인수에 매달린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대중국 수출의 통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쌍용차 인수를 밀어 붙였다. 매각 협상이 한창이던 2004년 7월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은 중국을 방문해 중국 정부와 쌍용차 투자계획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상하이자동차는 '헐값'에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2005년 1월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 지분 48.9%를 5,909억 원에 사들였다. 이후에도 상하이자동차는 나머지 지분을 꾸준히 사들여 그해 8월 51.3%의 지분을 확보했다.

문제는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차 인수가 대출자금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었다. 인수대금 가운데 절반은 중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나머지 절반은 한국의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으로부터 빌린 자금이었다. 대출자금은 언젠가는 상환을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핵심기술을 빼낸 뒤 회사를 처분하는 일도 충분히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시나리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비극의 씨앗이 된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차 인수

쌍용차의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는 2009년 2,646명에 대해 정리해고 조치를 단행했다. 전체인력 가운데 37%에 이르는 대량해고였다. 사측은 경영난 악화를 이유로 내세웠다. 표면적으로 볼 때, 사측의 입장은 타당해 보였다. 2008년 말 미국에서 불어 닥친 금융위기로 인해 기업환경은 급격히 악화됐다. 특히 자동차 업계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모터스와 크라이슬러는 미국 정부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 자동차 업계 스스로 경기불황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연비가 우수하고 환경 친화적인 제품 개발에 노력하기보다 고급 승용차나 SUV 판매에만 주력해왔기 때문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 가운데 유독 쌍용자동차가 경영난에 직면한 이유도 제품 라인업이 대형차와 SUV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 인수 이후 보인 행태를 주목해보면 반드시 금융위기가 경영난의 가장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2005년 인수 이후 쌍용차는 2007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줄곧 적자에 시달렸다. 특히 순손실의 규모는 해마다 커져 2005년 1,033억 6,000만원, 2006년 1,959억 6,200만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던 것이 2007년 45억 7,100만원으로 소폭 반등했지만 2008년 또다시 7,096억 8,400만원의 순손실을 냈다.

노동자 수도 해마다 줄었다. 2005년 당시 쌍용차 노동자들은 정규직, 비정규직, 사무 관리직 등을 다 합해 9,708명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8,882명, 2007년 7,860명, 2008년 7,779명으로 줄곧 감소세를 보였다.

쌍용차 노조는 상하이자동차의 인수 당시 고용 보장 및 단체협약 승계, 연구개발 강화 및 기술 이전 제한, 독립·투명 경영 보장, 약속 이행 장치(노사 경영위원회) 마련 등을 요구했다. 상하이자동차는 노조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특히 1조 2,000억 원 규모의 투자와 완전한 고용승계 등의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약속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인수 직후 상하이자동차의 임원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왔고, 이로 인해 독립경영 약속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자금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하이자동차는 자금지원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사측은 인수 직후인 2006년 7월 986명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자 노조는 즉각 반발했다. 노조는 16일간 파업을 벌였고 결국 사측은 구조조정 계획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큰 문제는 기술유출이었다. 지난 2006년 6월 쌍용차는 중국시장 진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상하이자동차와 중국 현지 차량 조립, 생산, 판매를 위한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 7월엔 모노코크 타입 SUV 플랫폼 개발을 시작했고, 여기에 상하이자동차를 참여시켰다. 이 모든 일들은 개발 투자에 따르는 위험부담과 개발 비용 및 플랫폼 공유를 통한 부품 개발 비용 절감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지분구조 상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의 대주주였다. 모기업이 대주주의 자격으로 자회사의 기술을 얼마든지 빼낼 수 있는 위치였다는 이야기다. 기술유출이 현실화되면 중국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쌍용차와 거의 똑같은 모델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쌍용차의 첨단 기술 가운데 일부는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갔다. 지난 2009년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는 하이브리드 기술과 디젤엔진 변속기 기술 등을 상하이차에 넘겨준 혐의로 쌍용차 종합기술연구소 소장과 임직원 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유출 혐의를 받고 있는 기술은 하이브리드차 중앙통제장치(HCU)의 소스코드(컴퓨터 프로그램을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바꾼 것)였다. HCU는 디젤 하이브리드차의 엔진과 변속기 등을 제어해 차의 연비와 성능을 높이는 장치다. 이 기술은 연구개발비의 50%인 56억 원 가량을 국고로부터 지원 받은 한편 2007년 국무총리실 산하 산업기술보호위원회로부터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받은 핵심 첨단 기술이다.

이에 대해 상하이자동차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상하이자동차측은 성명을 통해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기술은 디젤이 아닌 가솔린 하이브리드 엔진 기술'이라면서 '두 가지 기술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하이자동차의 가솔린 하이브리드 엔진 기술은 2010년에 양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쌍용차의 디젤 하이브리드 기술은 컨셉 단계에 있다'며 양사의 기술적 완성도에 차이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한국 법원은 기술유출의혹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쥐어줬다.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은 '쌍용차 임직원들이 상하이자동차에 제공한 하이브리드 자동차 중앙통제장치(HCU) 디스크립션은 원자료인 소스코드라고 보기 어렵고 설명 자료에 해당 한다'며 '이를 제공하는 데 국가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고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회사에 손해를 일으킬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같은 판결에 따라 불구속 기소된 7명의 임직원들은 전원 무죄선고를 받았다.

77일간의 옥쇄 파업, 그리고 22명의 죽음

▲ 쌍용차 노동자들은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사실 파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쌍용차의 경영악화는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의 방만 경영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원인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들에게만 고통이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업은 77일 동안 지속됐다. 이에 맞서 사측은 직장폐쇄로 대응했다. 결국 파업은 공권력 투입으로 일단락됐다. ⓒ 시사매거진 지유석 기자

상하이자동차는 2009년 쌍용차 경영에서 손을 뗐다. 쌍용차는 매각을 위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해 5월22일 쌍용차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사실 파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쌍용차의 경영악화는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의 방만 경영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원인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들에게만 고통이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업은 77일 동안 지속됐다. 이에 맞서 사측은 직장폐쇄로 대응했다. 단전, 단수, 가스공급 차단 등 가혹한 조치들이 뒤따랐다. 결국 파업은 공권력 투입으로 일단락됐다. 경찰의 진압은 무자비했다. 노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해,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최종 정리해고자 974명 가운데 468명(전체 48%)에 대해 무급휴직으로 고용 관계를 유지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노사 양측은 또 손해배상청구소송과 형사고발도 취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합의 이행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무급휴직자에 대한 복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조측은 '1년 뒤 복직을 전제로 합의했다'면서 약속이행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사측은 '1년에 적어도 16만대를 생산하는 등 2교대가 가능한 물량이 확보돼야 복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사측이 노조 간부를 상대로 보복성 소송을 벌이는 것도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이다. 사측은 조합 간부 65명에 대해 25억원 규모의 채권을 가압류 하는 한편 노조 지도부를 상대로 100억 원 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해고자들은 퇴직금과 주택 등을 가압류 당해 생활고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가 2009년 9월 총 1,388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74.7%가 신용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응답했고, 이 중 신용상태가 매우 안 좋아졌다는 비율은 33.8%에 달했다.

해고자들의 생활고는 참극을 초래했다. 2009년 5월 이후 현재까지 22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절반인 11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해고로 인한 생활고였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 대부분의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은 실정이다. 이들은 파업에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자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이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사실 노동자들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안전망이 취약해 가장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 생계가 직접적인 위험에 처한다.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분위기도 실직자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결국 해고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들의 절박한 외침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19일 사회 각 분야 인사 106인으로 구성된 '함께 살자, 100인의 희망지킴이(쌍용자동차 노동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했다. 희망지킴이는 발족 선언문을 통해 정부주도의 문제해결,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 쌍용차측의 정리해고 노동자·무급휴직자에 대한 전원 복직을 요구하는 한편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자성을 촉구했다. 이들은 5월11일 덕수궁 앞 대한문 광장에서 '쌍용차 22명의 희생자를 위로하고 연대하는 <악! 樂> 문화제'을 열어 해고 이후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어 17일엔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천도교 등 5대 종단 대표들이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해 사회통합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민사회가 쌍용차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건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일방적으로 희생만 강요당해 왔다. 이제 정부가 결자해지의 태도로 나설 차례다. 그동안 정부는 노동자는 물론 사회적 약자의 외침을 철저히 외면해왔다. 임기 마지막 해를 맞는 이명박 대통령이 유종의 미를 거둬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한진중공업, 사회적 연대의 과제 던져
노동자의 고공 농성.... 누구를 위한 비즈니스 프랜들리인가?

이명박 정부는 집권 이후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내세우며 노골적으로 기업 편향적인 정책을 폈다. 쌍용자동차의 경우, 비극의 씨앗은 전정권이 뿌렸지만 그 열매는 현정권이 거둬들였다. 특히 경찰의 쌍용차 파업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경찰 스스로 이를 우수 진압사례로 꼽았을 정도로 정권의 자본편향적인 자세는 두드러지게 부각됐다.

이 정부의 자본 편향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한진중공업이다. 사측은 3년간 수주물량 부진에 따른 경양난을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 400명에 대해 구조조정을 단행한데 이어 94명을 정리해고 했다.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맞섰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로 인해 김 지도위원의 고공 농성은 309일 동안 이어져야 했다. 결국 시민들이 사태해결의 단초를 제시했다. 시민들은 4차례에 걸쳐 이른바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이 자리한 부산 영도 조선소로 집결해 연대를 표시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민의 연대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측의 손을 들어주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정부는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누가 보아도 보복으로 보기 쉬울 만큼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책인가? 임기 말을 맞은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 책임자에게 던지고 싶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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