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58호,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와조 건물

서울 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98년 5월29일] 명동성당 준공

1898년 5월29일 명동성당이 준공됐다. 우리나라 천주교를 대표하며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와조 건물로 1892년(고종 29)에 착공한 지 6년 만에 고딕양식 건축물로 완성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로 평면은 라틴십자형 삼랑식(三廊式)으로 평면중앙에 네이브를 두고, 좌우에 아일을 두었는데 양 트란셉트는 한 스판정도로 본격적인 라틴십자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쌓아 중후한 맛이 나는데 20여 종의 이형벽돌을 만들어 세부설계에 부응하도록 했으며 필요한 곳에는 회색벽돌을 사용했다. 정면 출입구, 각 창의 형태는 뾰죽아치를 사용, 고딕양식을 이루고 대첨탑은 본당높이보다 비례상으로 낮아 보이나, 주변에는 소첨탑들로 장식했다. 종탑의 좌우측, 네이브와 아일의 경계 지점에는 다각형평면의 소탑들이 서 있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내부마감은 고스트 신부의 별세로 위돌박(Victor Poisnel) 신부가 맡아 마무리했다. 제대부와 신자석 사이에는 영성체난간이 있는데 초기성당인 대구 계산성당의 것과 함께 현존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러나 이 성당의 것은 본래 금속이었으나 2차대전때 일본인들이 강탈해 나무로 만든 것이 전하고 있다.

천장은 리브볼트이고, 기둥에는 주(主)피어 부(副)피어(Minor pier)등이 모여 하나의 족주를 이루고 있다. 후진은 각으로 꺾여 있고, 제대 뒤로 장발의 12종도를 사실적으로 그린 벽화가 있다.
명동성당은 약현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파리 외방선교회의 고스트(Eugence Jan, George Coste) 신부의 설계로 파리 외방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다 1896년 2월 그가 선종한 뒤 프와넬(Poisnel) 신부가 이어받아 마무리 지었다. 성당의 건축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노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미장이·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도중에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본래 명동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1882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주교 블랑(Blanc,M.J.G.)이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1945년 8.15광복 때까지는 종현성당을 불리다 이후에 지금의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그 동안 1947년과 1973년 두 차례의 수리공사와 사제관·교육관 등 부속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고, 교회창설 200주년을 맞아 1981년부터 스테인드글라스·지붕동판 교체 등 대대적인 복원수리공사에 착수, 1984년에 마무리 지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텔레비전 시상식 프로그램 중 가장 대형이고 텔레비전의 최대 이벤트중 하나다.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허리우드 루스벨트호텔에서 감독과 배우 등 영화인 2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당시의 아카데미상은 고작 20여 명의 위원회가 12개 부문의 수상작을 선출, 1회 작품상에 ‘일출(Sunrise: A Song of Two Humans)’이 선정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에는 100명의 위원들이 선출에 임하는 대규모 아카데미로 성장했다. 처음 15년간은 호텔에서 거행되다가 1944년부터 극장 상영에 이익이 되도록 극장 무대로 옮겼고, 1969년부터는 LA 카운티 뮤직 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론’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88년부터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Civic Auditorium)과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2002년에 헐리우드에 코닥 극장(Kodak Theatre)이 아카데미 전용 시상식장으로 사용되었다. 1953년부터는 NBC-TV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탔다.

한편 수상자들이 받은 높이 34㎝, 무게 3.85㎏의 나체조각상은 청동으로 만들어 도금한 것으로 나체상 아래 보이는 5개의 필름통은 배우, 감독, 제작, 기술, 각본 등 5개 분야를 상징한다. 이 인체조각상의 이름이 ‘오스카(Oscar)’로 알려지면서 아카데미상은 ‘오스카상’으로도 널리 불리게 됐다.
오스카 쇼는 긴장·매력·생방송의 예측 불가능성 등의 소구력을 가지고 있고, 텔레비전에 출현하는 스타의 의상과 행동은 잡지의 기사거리가 될 정도이다. 텔레비전 에미(Emmy)상 시상식도 오스카 쇼와 비교할 만하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질과 다양성에 있어 뒤지고 종류가 너무 많아 긴장감도 약하다. 오스카 시상식 진행자는 해마다 바뀌지만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가 15번 이상 진행을 맡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16개 부분에서 수상자를 선정, 특히 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주연, 각본상 등 이른바 ‘빅5’는 아카데미상의 가장 큰 영예의 상으로 꼽힌다.

[1970년 5월1일] 영친왕 타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1970년 5월1일 타계했다. 이름은 은(垠).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897년에 태어난 그는 1900년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립되었다. 그해 12월 통감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강요당해 비(妃)로 맞았다. 1910년 국권피탈로 융희황제(隆熙皇帝)가 폐위되자 왕세제(王世弟)로 불렸고,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적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하였다.

나약했지만 꺾이지 않으려 했던 순종과 달리 영친왕은 일본의 순치를 받아들였다. 일본 황실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으며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제1항공군사령관(육군 중장) 지위에까지 오르는 등 물질적으로 일본 황족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암살하자 매우 슬퍼하며 석 달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친왕은 일본 패망 후 황족의 지위도 잃고 귀국도 거부당하면서 심신이 쇠락해 갔다.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1963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했고 56년 만에 환국 했다. 그러나 뇌출혈로 인해 혼수상태인 채로 귀국한 그는 호전되지 못하고 1970년 5월1일 7년 여 병상생활을 하다가 75세의 일기로 결국 생을 마감했다. 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는 영원(英園)이다.

끝까지 그의 생계와 명예를 지켰던 것은 부인 이방자 여사였다. 뇌혈전증으로 계속 병상생활을 하면서도 부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사회사업에 뜻을 두고 1966년 심신장애인재활원인 자행회(慈行會), 1967년 신체장애인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했다. 이 여사는 메이지 천황의 친족으로 히로히토 황태자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였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대한제국 황태자와 결혼했다. 황족의 명예와 재산을 몰수당한 후에도 영친왕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 여사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국가의 생활보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농아와 소아마비 장애인 재활사업에 열정을 보인 이 여사는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 받았다.
미망인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면서 명휘원을 경영하다가 1989년 4월30일 사망해 영원에 함께 묻혔다.

[1989년 5월3일] 5.3 동의대 사건

1989년 5월3일 경찰이 부산 동의대 도서관으로 진입했다. 전날 학생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전경 5명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사건의 시작은 4월30일, 5월1일 노동절을 맞아 부산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고 파압을 지지하는 시위에서 시작됐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진출해 인근의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으며 경찰은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기 위해 실탄 24발을 발사하고 주동자를 검거했다. 다음날 학생들은 경찰의 총기난사 규탄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다시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하자, 학생들은 시위대로 위장하여 사찰 및 검거 활동을 하던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도서관에 감금하고 농성했다.
학생들은 감금한 경찰들과 연행된 학생들을 교환 석방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에 응하지 않고 5월3일 새벽, 도서관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7명이 사망했다. 3명은 불에 타 숨지고, 4명은 불길을 피해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이밖에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진압 결과 학생 90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77명이 구속, 31명은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또는 현조건물방화치사상죄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을 47명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화재 원인에 대해 검찰은 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서관 복도에 시너와 석유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 1심과 2심에서 화재 원인을 달리 판정했다. 경찰과 검찰은 화인감정서 제출을 거부하는 등 화재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 대해서도 사전에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는 등 안전 조치에 만전을 기하지 않고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후 2002년 5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1인당 2,5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결정,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에 이 사건으로 순직한 경찰관 7명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1919년 5월4일] 중국 5.4운동 발발

우리나라 3.1운동에 영향을 받아 1919년 5월4일 발생한 중국 최초의 대중운동이다. 5월4일 오후 1시 북경의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 3,000여 명이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후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이 중심이 되기는 했으나 학생, 상인, 노동자의 세 부류의 주축을 이뤘다.
이들의 시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승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산동성에 대한 특권을 일본이 계승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었다. 대륙 침략의 의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이미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태리와 ‘독일의 권익을 일본에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비밀 약속을 체결해두었다. 일본의 산동 흡수 조치에 격분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은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징벌하자’ ‘21개조 취소’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여나갔다.

분노한 학생들 사이에서 매국노 조여림의 이름이 나오자 학생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고 집을 불태웠다. 이에 경찰이 책임을 물어 32명의 학생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체포학생의 석방을 요구했고 북경의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이들에 동조했다. 정부는 압도적인 항의 여론에 눌려 학생들을 전원 석방했지만 일본의 산동 흡수 조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에 학생들은 일본상품 배척,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 정부는 가두연설을 한 학생 7명을 총통령위반으로 체포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학생들은 체포를 각오하고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계속된 시위에 정부는 마침내 6월10일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 세명의 고관을 파면, 베스사이유 강화조약에 조인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상해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투쟁은 이후 중국민중이 공화정을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5.4운동은 이전에 소수 혁명가의 무방봉기나 정객, 군벌의 세력다툼에 불과했던 정치운동을 학생, 상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시위, 파업, 불매 등을 통해 정치세력화 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다.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