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 마음껏 활약하고 꿈 키우는 무대 만들고 싶었어요”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3월14일 오후, 원주행 취재차량에 몸을 실었다. 토종 종합격투기 ‘ROAD FC(이하 로드FC)’를 이끌고 있는 정문홍 대표를 인터뷰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미리 고백컨대 그날의 취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담당 기자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저 묻어가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인 데다 종합격투기는 TV 채널을 돌리다가 가끔씩 지나치며 봤을 뿐 단 한 경기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원주행 취재차량에 몸을 실었던 이유는 코앞으로 다가온 4.11총선 탓이었다. 지난 수 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 일해 왔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기자조차 뉴스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쉼 없이 이슈가 쏟아졌다. 종합격투기로 따지자면 본선을 치르기도 전에 넉 다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탓에 나에는 콧속에 넣을 얼마간의 바람과 잠시 동안의 휴식이 필요했다.

무게 있는 책, 무게 있는 인터뷰

길이 막히지 않았던 덕분에 예정했던 3시보다 30분쯤 일찍 체육관에 도착했다. 로드FC에서 홍보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김성원 실장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줬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묘령의 직원이 가져다 준 커피를 한가롭게 즐겼다. 체육관 한쪽에서는 3월24일 개최되는 로드FC 일곱 번째 대회를 준비하는 선수들로 분주해 보였다.
담당 기자는 김 실장과 종합격투기와 이번 대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스포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문홍입니다.”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정 대표가 정확히 3시에 나타났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긋한 나이에 깔끔한 정장 그리고 왁스로 머리를 정돈한 모습을 상상했던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토종 종합격투기를 이끌어 가는 대표의 모습이 아니라, 방금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파이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 그는 인터뷰 직전까지 대회에 출전하는 후배들의 기량을 점검하고 스파링을 지도하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담당 기자는 미리 준비해 간 질문을 천천히 던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단답형 답변뿐이었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여백이 생겼고, 자꾸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당연히 담당 기자의 낯빛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이른바 ‘거물급 정치인’을 가끔씩 인터뷰하는 나에게도 그 장면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대개의 정치인들은 말이 많다. 굳이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기자를 만나는 사람들은 받아 적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정 대표는 지나치게 말을 아꼈다. 그것은 말 주변이 없어서라기보다 매우 신중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꾸려온 본지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기획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책의 무게’를 조금 낮춰보자는 의도였는데, 정 대표는 이런 기획의도를 무색케 했다. 인터뷰대로라면 4월호의 무게는 두 배쯤 더 무거워질 판이었다.

“선배, 이번 인터뷰 엎어진 것 같은데요”

   
 
담당 기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낼 무렵이었다. 정 대표는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자리를 떴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명함을 가져왔다. 인터뷰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난 뒤였다. 돌아온 그는 비로소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로드FC가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걸로 제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반대로 스폰서를 제대로 잡지 못해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린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둘 다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돈을 벌기 위해 로드FC를 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희를 지원하겠다는 기업과 개인이 너무 많아 고민을 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제가 사비를 털어 로드FC를 열고, 지속적으로 이를 이어가는 이유는 후배들이 마음 놓고 경기를 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 대표의 이야기는 한 동안 계속됐다. 마치 억장이 무너진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가 일본에서 데뷔전을 치르기 위해 땀을 흘렸던 이야기, 효도르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이야기, 그토록 염원했던 데뷔경기 직전에 부상으로 인해 무산된 이야기 등 지난 십 수 년 간 정 대표가 살았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그제야 인터뷰 초반에 보았던 정 대표의 신중함의 연유를 깨닫게 됐다. 천박한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 어려운 가운데 문을 열고 막 빛을 보려는 로드FC를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했을지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드FC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분명히 확신합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로드FC가 유명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저희를 더욱 눈여겨 볼 것이고, 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흠결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그런 과오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에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명예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가까스로 자리 잡은 후배들의 터전을 망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저 구경꾼으로 따라갔던 나는 어느새 정문홍 대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의 인터뷰가 내 것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미리 인터뷰 준비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담당 기자는 뒷전에 두고 내가 직접 질문을 던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것

정 대표는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어쩌면 갈망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종합격투기 선수가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 만들기와 관련이 깊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거액의 스폰을 받는다면 로드FC의 규모와 명성은 지금보다도 수십 배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은 선수의 집중력과 초심일 수밖에 없다. 정 대표가 숱한 스폰 제의를 거절하고 사비를 들여 대회를 꾸려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7회를 넘긴 이번 대회를 지원한 스폰서들은 이런 상업주의가 아닌 정문홍 대표의 열정과 초심에 매료된 이들이 십시일반 모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본지가 인터뷰 지면을 할애한 대신 정문홍 대표는 아주 대단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돈이나 물질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정치부 기자를 감동시킨 그 초심을 끝까지 지켜가며 국내 종합격투기의 중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컴퓨터를 켠 후 내가 가장 먼저 펼친 페이지는 정치면이 아니었다. 스포츠 분야였고, 로드FC와 정문홍 대표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나에게 그 순간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종합격투기와 자신의 후배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이를 온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사나이, 정문홍 대표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을 집요하게 추적해 볼 생각이다.
그날 그가 흩뿌려준 ‘매력’ 덕분에 시사매거진의 독자 분들이 호강하게 생겼다. 본지는 향후 지속적으로 로드FC의 활동과 국내 종합격투기 종목의 중흥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로드FC와 정문홍 대표를 만났다. 이 인연이 향기로운 결실로 이어질 날까지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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