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운동 활기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삶의 권리를 외쳤다. 이날 이들의 외침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어 국제적인 연대 운동으로 퍼지며 활발하게 일어났다.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 현재까지 매년 3월8일을 기해 세계적으로 기념대회가 이어져 오고 있다.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

1908년 3월8일, 경제 공항에 의한 경기 침체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1만 5,000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뉴욕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소리 높여 외쳤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원한다!”
여성노동자들은 더 나은 작업조건에서 일하고 남성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빵)과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표할 권리(장미)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대부분 10대인 어린 노동자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초착취 의류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8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여성들에게는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지 않기 위해 일하면서도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 시위는 여성 평등을 바라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이후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각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 여성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으로 여성운동의 시초가 된 미국여성노동자시위가 일어난 3월8일이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여성의 날’에 미국에서는 3월 내내 여성계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중국은 공식휴일로 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처음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일제에 의해 행사가 취소돼 1980년대까지 맥이 끊겼다 1985년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이래 매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축하하는 전국적인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한편 대표적인 여성운동으로는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아바)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시위 등을 들 수 있다.

[1770년 3월5일] 미국 ‘보스턴 학살’ 사건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은 1770년 3월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의 부두에서 술을 마시던 노동자들과 주둔군 사이에 시비가 붙은 일이 유혈 사태로 확대된 사건이다.
3월5일, 주둔군 숙사 앞에 모여 있던 군중과 주두군 보초와의 다툼이 생기자 그곳으로 달려온 주둔군에게 식민지인들이 눈덩이를 던졌고, 그 눈덩이에 맞은 군인이 화가 나자 식민지인들에게 발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상되었다. 당시 발포한 병사 8명과 대장 T.프레스턴은 식민지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병사 2명의 가벼운 유죄를 제외하곤 전원 무죄 석방되었다. 이에 항의한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독립혁명론자 등이 주둔군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매사추세츠 식민지 부총독 T.허친슨이 군대를 보스턴 항내의 섬으로 이동시켜 소란의 확대를 방지했다.

나라 전역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나기 여러 해 전부터 영국정부를 배척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간의 갈등은 보스턴 시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서 홍차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린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폭발해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미국혁명을 앞둔 몇 년 동안 보스턴은 식민지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보스턴은 무역 도시로 보스턴의 선박과 상인들은 대서양의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영국 선박과 상인들과 경쟁했다. 그러자 1750년대와 1760년대 영국은 보스턴의 상인들에게 점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인쇄물에 고액세금을 매긴 인지법, 설탕·커피·포도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 설탕법 등은 식민지 사람들과 영국간의 대립을 야기 시켰다. 보스턴 사람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영국은 1768년에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이후 2년 동안 보스턴 사람들은 도시에 주둔하는 군인들에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1770년 2월 영국군이 사고로 한 소년을 죽인 것에 보스턴 시민들은 크게 동요했고 3월5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보스턴의 노동자·선원들과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사이에 벌어졌던 잇따른 분쟁은 이 사건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2004년 3월12일 국회는 헌법 제65조 제12항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한다. 2004년 1월5일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된 탄핵은 같은 해 3월5일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을 했다.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9일 15시49분 국회의사국에 접수된 탄핵소추안은 그날 18시27분에 본회의에 보고하고 사흘 뒤인 3월12일 제안설명도 유인물로 대체한 채 무기명 투표를 실시, 재적의원 271인 중 193인의 찬성, 반대 2인으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당시 국회에서 통과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과 지지자 모임에서 행한 발언과 연설이 거듭하여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했고,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 그리고 참모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상실하였으며 세계적인 경기호황 속에서도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국민에게 IMF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불행을 안겨 주었기에 탄핵소추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 날부터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고, 국정은 고 건 대통령 권한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탄핵소추안 가결으로 야당에 대한 전국민적인 질타가 쏟아졌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탄핵 찬반진영의 논쟁이 국민들 사이에 불붙기 시작했고, 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은 탄핵 무효를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잇따랐다. 각종 시민단체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야 3당의 쿠데타, 3.12쿠데타로 규정하고 탄핵안 철회운동에 돌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 단체들도 탄핵철회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4월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에까지 이어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 제2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유민주연합은 4석을 얻었다.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헌법재판소는 심의에 착수, 평균 주 2회씩 7번의 공개변론과 10회에 가까운 평의를 개최하는 등 집중적인 심리가 진행되었다. 같은 해 5월14일 국회의 심판청구를 기각하며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복귀한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1948년 대한민국건국헌법의 제정이후 최초로 국가원수이자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의결된 것으로 헌정사적 의미가 크다.

[1960년 3월15일]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15일 자유당정권에 의해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부정과 폭력으로 재집권을 시도한 사건이다. 
1960년 예정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던 중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당초 5월에 치르려던 선거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가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3월15일로 앞당겼다. 이 와중에 조병옥 박사가 사망하자 선거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부통령 선거에 모아졌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자유당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해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3월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발생 시위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어 4월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부정선거의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되었다. 결국 같은 해 4월26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1978년 3월16일] 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 납치

총리를 다섯 번이나 지냈던 이탈리아의 거물급 정치가 알도 모로(Aldo Moro, 1916년 9월23일~1978년 5월9일)가 1978년 3월16일 극좌파 게릴라 단체인 ‘붉은 여단’에 납치됐다. 로마의 한적한 주택가에 갑자기 나타난 붉은 여단 단원들은 경호원 다섯 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모로를 납치해 갔다. 이들은 납치범들은 토리노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13명의 붉은 여단 대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납치범들은 로마 시내에서 모로를 살해, 55일 만인 5월9일 로마 시내의 한 차량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집권 기민당전국평의회 의장이었던 모로는 납치되어있는 동안 그의 당원들에게 몇 차례나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정부당국은 끝내 범인들과의 타협에 불응했다. 이 사건과 관련, 프란체스코 코시코 내무장관이 사임하는 등 이탈리아 정부는 한때 위기에 봉착했다.

1916년 9월23일 레체에서 출생한 모로는 1940년 파리대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이래 로마대학교 법률학교수를 지냈다. 1946년 헌법제정의회 의원이 되었고, 그 후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에 입당했다. 1947년 외무차관, 1953년기독교민주당 하원 원내총무, 1955년 법무장관, 1957년 공공교육장관, 1959년 기독교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1963년 11월 기독교민주당·사회당·사회민주당·공화당의 4당 연립에 의한 중도좌파의 내각을 조직했다. 그 후 1964년 제2차, 1966년 제3차 등 4년 반에 걸쳐 조각하여 유럽의 ‘좌선회(左旋回)’의 주역으로 주목 받았다. 1968년 총선이 끝난 뒤, 6월5일 관례에 따라 사임했다. 1970~1972년 외무장관으로 일했으며, 1976년 2월12일부터 4월30일까지 다시 총리직을 맡았고, 7월9일까지 과도 내각의 수반으로서 공직에 머물렀다. 1976년 10월 기독교민주당 당수가 되어 공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정계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사회 의장으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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