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인 정리해고에 세상을 등진 21명, 끝나지 않은 노(勞)사(事)간의 갈등

정리해고 이후 흐른 2년 9개월 이라는 긴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옥쇄투쟁을 하던 해고 노동자는 단 한명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사측은 올해 3조 원이라는 매출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영이 어렵다는 이야기만 되풀이 하고 있다. 그 사이 21명의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무참하게 희생자가 되었고, 남아있는 이들 마저 복직에 대한 아무런 희망의 빛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듭된 경영난이 빚은 파업

쌍용차의 본격적인 성장은 세계 최고수준의 자동차 기술력을 인정받는 독일 벤츠와의 제휴로부터 출발했다. 소형승용차와 디젤엔진에 대한 기술제휴부터 대형승용차 및 가솔린엔진 기술제휴, 자본 합작까지 벤츠와 꾸준한 협력관계를 이루어 온 쌍용차는 단기간 내에 선진기술의 이전을 가능케 했다는 대내외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IMF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쌍용차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으며 이에 국가차원의 산업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대규모 투자로 사업 확장을 꾀하던 대우에게 인수됐다. 그러나 세계경영이라는 이름 아래 동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유럽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무리하게 확장경영을 하던 대우역시 이러한 경영난을 피해가긴 역부족이었다. 계속된 부채누적과 쌍용차 자체적인 판매부진으로 적자를 거듭했으며 마침내 2000년 쌍용차는 분리되어 채권단 주도의 독자경영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심한 경영난을 겪은 쌍용차는 2004년 자사의 기술발전을 목적으로 그동안 쌍용차가 축적해온 기술력 흡수를 노린 중국의 상하이자동차(상해기차집단고분유한공사)에 인수되었다. 그러나 이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 고유가시대에 대형세단과 SUV 시장만을 노린 쌍용차의 판매부진과 운전 자본력 부족으로 급격한 매출 감소를 겪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단기 채무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진 상하이차는 2008년 말 쌍용차 파산보호신청을 냈다.

이후 긴박한 자금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쌍용차는 2009년 법정관리 신청을 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청산가치와 존속가치를 두고 평가를 거듭한 법정 평가단은 존속을 결정하며 2009년 4월8일 정리해고를 실시하기로 확정, 정리해고에 들어갔다. 이에 노동자 2,646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으며 ‘해고 없는 정상화’를 외치던 노동자 978명은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기술력을 흡수하는 데만 진력하고 쌍용차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는 무책임하게 대처한 상하이차는 쌍용차의 하이브리드 엔진기술 및 핵심연구원들을 중국의 현지 본사로 빼돌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을 더욱 가중 시켰다. 또한 노사 간의 분쟁으로 몰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파업에 제일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 받았다. 당시 상하이차가 경영권을 인수하던 과정에서 4년 동안 단 한 푼의 투자도 하지 않았음이 드러나면서 애초 매각 협상 시 합의 한 기술이전료 1,200억 중 절반인 600억 만을 지불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파업 그 77일간의 여정

지난 2009년 4월8일 쌍용차는 전체인력의 37%에 해당하는 2,646명에 대한 정리해고 신고를 일방적으로 시행했다. 이에 화가 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5월22일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옥쇄파업에 돌입, 총 파업을 선언했다.
공장 점거 강행으로 사태가 심각해지자 사측은 노조 측에게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최종 정리해고자 976명에 대해 ‘희망퇴직 450명, 무급휴직 후 복직 200명, 분사 영업직 전환 320명’을 제안했으나 노조측은 “정리해고를 위한 술수”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26일에는 사측 임직원 3,000여 명이 공장 주변 울타리를 제거하며 강제진압을 시도했고 노조측은 이에 반발하여 인화물질이 보관되어 있는 도장 공장으로 진입하는 등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졌으며 사태는 점점 극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였다. 법원은 7월20일 쌍용차 노조에 대한 퇴거명령을 강제 집행 했으며 극도로 흥분한 노조는 경찰과 사측을 향해 볼트새총을 쏘고 타이어를 불태우며 분노를 표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고 살수차를 동원하는 등 강제진압으로 맞섰다. 이 외에도 노조의 투쟁은 점점 거세져 몇 차례 유혈 사태를 빚기도 했으며 경찰은 레이저건을 사용하고 최루액을 살포하는 등의 강경 진압으로 맞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파업사태 42일 만인 7월30일, 노사는 분수령을 맞기도 했다. 쌍용차협동회가 “기업정상화가 어렵다면 조기파산신청을 내겠다”고 밝히면서 노사가 같은 의지로 뭉칠 것인가에 기대가 모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측은 “노조가 총고용 보장만을 요구한다”며 결렬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쌍용차 협력회 채권단은 예정대로 파산신청 강행을 공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제2의 용산참사 우려를 낳는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사측이 경찰의 공권력을 투입하여 옥상진압을 시도했으며, 노조들을 제압하려했기 때문이다. 공장 장악을 시도하는 경찰을 피하던 노조원 2명은 옥상에서 추락했으며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과잉진압도 이어졌다. 이에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부상자들의 치료는 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먹고 마시는 것, 잠자는 것도 녹록치 못했다. 사측이 이를 모두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8월5일, 78명의 자진이탈자가 발생했으며 더 이상 파업 투쟁 강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조측은 사측에 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태발생 77일만인 8월6일, 노사는 ‘전체 정리해고자 974명의 48%에 대해 무급휴직으로 고용관계를 유지하고 52%는 희망퇴직을 받거나 분사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사측은 무급휴직자에 대해 1년 경과 후 생산 물류랑에 따라 순환근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간연속 2교대 근무를 시행하고, 영업전직을 위해서는 영업직군을 신설하고 지원금 월 55만 원을 1년간 지급하는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달라진 것 없이 희생자만 늘어

1,000일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은 아직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노동자들과 이들의 가족 21명이 각종 질환과 자살 등으로 세상을 등 졌다는 결과만이 남겨져 있는 상태다.
지난 13일 사망한 민 아무개 씨는 스물한 번째 희생자가 됐다. 민 씨는 2009년 구조조정 당시 정리해고 대상자로 분류되어 희망퇴직을 선택했었으며 이후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자주 마신 탓에 당뇨와 그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1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스무번째 희생자 강아무개 씨는 희망퇴직 이후 심각한 우울증과 알콜 중독 증세를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으며, 회사의 일방적인 정리해고로 인해 재직, 퇴직 노동자 8명과 이들의 가족 3명은 스트레스성 외상 증후군과 우울증 등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강 씨를 포함한 퇴직노동자 6명과 재직노동자 3명, 그리고 가족 1명은 심근경색과 뇌출혈 등 스트레스 질환으로 숨지기도 했다.

반면 쌍용차는 신형 자동차가 인기를 끌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파업 직후에 반 토막이 났던 매출액은 회복되었으며 생산량도 3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사측은 “3분기까지도 1,000억 원 이상의 적자고 판매는 서서히 회복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정상 기업으로 가기 어려운 경영환경이다”라며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공장의 가동이 정상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자 가운데 절반가량을 1년 뒤 복귀시키기로 했던 노사 대타협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평택공장에서는 5,000여 명 정도의 노동자만이 일을 하고 있다. 당시 7,000여 명이 일을 하던 공장에서 2,646명이 구조조정 된 후 회복되지 못한 근로자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반증하는 결과다. 1,000일이 지났으나 공장으로 돌아간 무급휴직자는 단 한명도 없다. 이에 노조측은 “이미 1년이 지났고 햇수로 3년 차이기 때문에 약속은 불이행한 것은 사측이다”라며 “합의서란 것은 서로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 아닙니까?”라고 힘없는 목소리만을 낼 뿐이다. 

더욱이 이들은 더 이상 시위를 멈출 수도,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정리해고 된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무급휴직자이다. 현재 무급휴직자의 신분은 쌍용차직원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도, 옮긴다 해도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다. 쌍용차 평택공장 앞 시위 중인 한 노조원은 “죽지 않고 살아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일하던 그 곳으로 가고 싶다는 한 가닥 희망만을 가지고 버티고 있다”고 전해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케 하기도 했다.       
노동단체들과 시민사회도 쌍용차 문제에 적극 나서는 분위기다. 금속노조 산하 33개 단체의 조합원들은 쌍용차 정리해고자들과 함께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지난해 12월부터는 한진중공업 사태 때 등장했던 ‘희망버스’에 이은 ‘희망텐트’시위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희망버스기획단은 서울을 출발해 쌍용차 평택공장까지 ‘희망발걸음’을 시작해 지난 1월 말부터 도보로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의 문제를 적극 알리기도 했다. 이들은 여전히 퇴직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본과 정권은 아무런 대책을 내 놓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노동계와 야권은 2012년 총대선 정국을 맞아 쌍용차 정리해고를 비롯한 노조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밝히고 나섰다. 민주통합당은 지난 2월8일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를 통해 유럽식 정리해고제도 도입 등의 노동개혁 정책을 발표했으며 민주노총은 총파업 요구조건으로 정리해고 철폐를 내걸었다. 11일 평택 공장 앞에서는 ‘3차 쌍용차 공장 포위의 날’ 행사가 열렸으며 이 행사에는 각 정당의 정치권 인사들이 참가해 쌍용차 사태와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2012년 총대선 국면을 맞고 있는 현 시점에 법 개정 투쟁으로 자본에 의해 남용되고 있는 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실제로 정리해고법은 정리해고를 위한 기업의 법적인 길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리해고법이 기업의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 규제가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쌍용차 노동자들은 ‘3차 포위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 더 이상 희생자가 없고, 더 이상 절망하지 않기 위해 함께 마음을 다시 잡는다. 그리고 이들은 복직이 될 때까지 투쟁을 멈출 수가 없다. 1,000일을 함께 싸워온 동료들과 이들의 곁을 지키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고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들은 절규만이 가득한 희망텐트에서는 노동자의 권리와 재벌의 권력을 포함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들의 한탄과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한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끝까지 희망의 빛을 바라고 있는 이들의 간절함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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