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진 밑동까지 내어주는 아름드리 나무 되고파”

   
▲ 행복공장만들기운동본부 정덕환 회장
‘장애인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이가 있다. 장애인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이다. 한때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국가대표 유도선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한순간에 장애인이 되었다. 수많은 날과 밤을 절규하며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참혹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모질어지는지, 전신이 마비된 몸을 일으켜 장애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지금, 그는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장애인의 대통령’이 되었다. 척박했던 우리 사회 장애인에 대한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꾼 이 사람은 바로 정덕환(71) 에덴복지재단 회장이다.

 
벚꽃이 흩날리던 4월 중순, 파주에 있는 에덴복지재단을 찾았다. 멀리서 보이던 재단의 건물은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다. 가운데 본관을 중심으로 중증장애인 다수고용사업장인 ‘형원’, 국제교류협력센터이자 정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행복의 집’, 그리고 작업장으로 쓰이는 건물 등이 둘러서 있었다. 마당에서 일에 열중하던 직원들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맞아준다. 하나같이 선한 표정들이다. 때마침 마당 한편에 있는 꽃밭의 꽃들이 봄바람에 살랑인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행복의 집 건물은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로 환했다. 장애인이 사용하는 시설답게 모든 문은 미닫이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나 휴지걸이, 세면대 등 물건들의 위치도 눈에 띄게 낮았다. 장애인들 높이에 맞춘 것이라는 설명이다. 1층 회의실을 돌아 들어간 사무실에서 정 회장을 만났다. 생각보다 체격이 크고 건장해 얼핏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깜빡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래위로 미세하게 흔들며 내미는 정 회장의 손을 잡는 순간, 무감각한 인형의 손을 잡는 것 같은 느낌에 비로소 그가 전신마비 장애인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정 회장의 얼굴은 한없이 밝았다. 칠순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는 고운 외모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단 1초도 통증이 끊이지 않는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하는 몸 속 구석구석의 통증은 그나마 버텨내고 있는 육신을 난도질하는 예리한 칼날 같다. 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할 고통이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는지 모른다고 정 회장은 말한다. 일에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잠시라도 통증을 잊을 수 있단다. 어쩌면 지금의 에덴복지재단이 존재하는 것은 이 끊이지 않는 고통에 대한 정 회장만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 파주에 자리한 행복공장만들기운동본부
잘나가던 국가대표에서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서울 보문동에서 운수업을 하던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정 회장은 어려서부터 동네에 소문난 악동이었다. 근처 재래시장에라도 갈라치면 소담스럽게 쌓아올린 설탕이나 밀가루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두부를 으깨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용돈이 필요할 때는 다짜고짜 어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가져가기도 했다. 이렇게 말썽만 부리던 그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유도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경동고등학교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하던 큰형의 영향으로 배우기 시작한 유도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중3 때 나간 ‘전국 유도사설도장 대항전’에서 1등을 차지하며 단번에 유망주로 부상했다. 당시 정 회장의 결승전 상대는 경희대 체육학과를 다니던 대학생이었는데, 업어치기 한판으로 제압했다고 한다.
이후 성남고 유도 특기생으로 입학해 승승장구하던 정 회장은 유도 종주국 일본에서 가진 시합에서도 연전연승하며 고교 3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불허이기에 그 의미를 가진다는 어느 말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그해 여름, 대한유도회가 주최하는 특별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명륜동 도장엘 갔다. 몸을 푼 뒤 대련에 들어갔는데, 평소처럼 나의 장기인 ‘낮은 업어치기’로 상대선수를 매트에 내던지려던 순간, 매트에 거꾸러진 건 그 선수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덮쳤다.”
잠시 숨을 죽이나 싶던 정 회장은 “그때 목이 부러져 경추 4,5번을 다쳤고, 전신마비가 되었다”며 엷게 웃는다. 이후의 삶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처절한 고통을 알 수 있을까. 그렇게 10년을 울분 속에서 살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고마운 사람이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돌봐줬던 사람인데, 목 아래는 감각조차 없는 전신마비인 나를 씻기고, 먹이고, 운전하며 모든 것을 수발했던 사람이다. 가족도 쉽지 않은 그 일을 정말 묵묵히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라고 정 회장은 소회한다.
그 와중에서도 유도에 대한 정 회장의 애정은 끊어지지 않아, 각종 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후배들의 모습에서 힘을 얻곤 했다. 당시 연세대 유도부는 사범이 없이 실력이 좋은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시스템이어서, 최고 실력을 자랑했던 정 회장은 사고 전까지 유도부 주장을 꿰차고 있었다. 그런 후배들의 모습을 보자 유도 코치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연세대 유도부를 찾았다.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했다.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몸은 못 움직이지만 기술은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안 된다고 했다. 사무실을 나와서 캠퍼스를 내려오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왔다.(웃음) 그때 결심했다. 나 같은 장애인을 도와야겠다고. 그러던 와중에 장애인 5명이 모여 사는 장애인공동체를 만났다. 정부의 보조금도 없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는 그들을 돕다가 본격적으로 장애인 복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화식품을 운영할 때라 일을 해서 수익을 내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에덴복지재단의 전신인 에덴복지원이다.”
그러나 세상은 혹독했다. 장애인들에게 일감을 주는 업체는 없었다. 문전박대와 손가락질로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기 일쑤였으나 선수생활로 다져진 끈기는 포기를 몰랐다. 오히려 매일 눈만 뜨면 전자부품 업체를 찾아다니고 또 다녔다. 그렇게 시작한 복지사업이 이제는 500여 명을 먹여 살리는 대규모 공장이 되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새삼 과거 일을 떠올리니 울컥한다. 나는 에덴복지재단에서 일하는 것이 삶이고 낙이다. 에덴이 하나하나 성장해가는 만큼 나도 비례해서 커나간다. 우리 삶에 고통이 없다면 진정한 완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과 시련, 아픔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완전해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장애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산적 복지’
‘생산적 복지’의 개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87년 영국에서다.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앤서니 기든스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제3의 길’을 통해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 둘을 접목한 새로운 복지 이념을 만들었다. 선별적 복지의 경제적 효율성도 달성하면서 보편적 복지의 근로 의욕 저하나 재활 의욕 저하도 예방할 수 있는 ‘생산적 복지’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시혜적으로 복지를 베풀기보다는 스스로 재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제도다. 이런 생산적 복지를 국내에 도입해 뿌리를 내리게 한 이가 바로 정 회장이다. 누구나 생산적 복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또 적극적으로 정책을 만들어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업장을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대상자가 중증장애인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중증장애인은 흔히 의학적으로 말하는 중증 지체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복지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중증장애인은 의학적인 중증장애인, 즉 나처럼 전신이 마비되어 몸을 쓸 수 없는 지체장애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중증장애인은 이런 지체장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이 없고 사회성이 없는 지적장애인과, 자폐성까지 동반한 발달장애인을 말한다”며 “이런 지적장애인들은 어디에서도 일할 수 없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통한 생산적 복지를 실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일자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 없다면 삶도 없지 않겠는가. 장애인 중에서도 약자에 속하는 이들 지적장애인들을 일하게 하고, 직업을 통한 재활로 생산적 복지를 실현하는 곳이 바로 우리 에덴복지재단이다”라고 정 회장은 설명한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상품을 만들어도 팔 데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판로가 없다는 것은 일자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뼈 빠지게 일만 했지 수익이 없다면 재활은커녕 복지 실현은 꿈조차 꿀 수 없다. 1983년 5명으로 시작한 에덴복지원 시절부터 판로개척의 필요성을 몸소 체험한 정 회장으로서는 판로를 위한 확고한 방안이 절실했다. 그래서 35년 동안 복지와 관련한 곳들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탄생시킨 법이 바로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법은 말 그대로 중증장애인들이 만든 생산품을 우선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고생은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나마 17대 국회위원이었던 정하원 의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생각해도 감정이 북받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그런데 복지 관련 부서를 찾아다니다 보면 보통 4~5층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복지과가 한직이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9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공공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많지 않았다. 그러면 4~5층까지 휠체어를 타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러면 양쪽에서 두 사람이 휠체어를 잡고 뒤로 비스듬히 눕혀 한 계단 한 계단 끌고 올라간다. 아차 실수라도 하는 날엔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다.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올라 복지과에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던 공무원의 눈빛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미어진다.”
정 회장의 이런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에덴복지재단이 있는 것이고, 그곳에서 일을 하며 재활을 꿈꾸는 500여 명의 중증장애인들이 있는 것이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행복공장’으로 도약하는 진정한 장애인 재활
현재 에덴복지재단의 배태라 할 수 있는 것이 ‘이화식품’이다. 35년 전 정 회장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작은 구멍가게다. 겨우 앉아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거스름돈도 거슬러줄 수 없어 손님들이 직접 거슬러갔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학용품이라도 하나 사주고픈 간절한 마음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힘이라곤 쓸 수 없는 손이지만 그 손으로 삼발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물품을 실어 날랐다. 운전대를 잡지 못해 쓰러지기도 수없이 했다.
“그렇게 일군 3평짜리 이화식품이 요즘 대두되는 ‘생산적 복지’의 태동이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에덴복지재단을 ‘장애계의 삼성’이라고 부른다. 삼성이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구하고 투자했겠나. 말로만 장애계의 삼성이 아니라 에덴복지재단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말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라며 “지적장애인들을 일을 시키고, 자립시킨다는 것은 말 몇 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 사람들을 그 안에 몰아넣는다고 뚝딱 제품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몇 날 며칠 쉼 없이 일을 해도 분량을 못 맞춰 낭패를 본 적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에덴복지재단을 운영하는 데는 삼성보다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한다”라고 정 회장은 토로한다.
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 시설에서는 가능한 한 장애인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이는 정 회장은 이미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수혜적 복지, 시혜적 복지를 하는 것은 그들을 또다시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취약계층이라든가 생활보호대상자 같은 명목을 만들어 국가가 막연하게 지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정부가 지원해줘야 할 사람들은 지원해줘야 한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장애인들은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국가가 먹이고 입히는 것에 인이 박히게 하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는 정 회장은 “온전한 장애인의 재활시설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항상 어우러져야 한다.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 비장애인이 경영에서 생산까지 각자 맡은 역할을 함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장애인 재활시설이 될 수 있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될 수 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런 정 회장의 복지철학이 온전히 녹아들어 더욱 확장된 것이 바로 ‘행복공장’ 프로젝트다.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보다 질 높은 복지를 지적장애인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에덴복지재단을 운영하면서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장애인들이 제대로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은 하는데, 그 돈은 정작 다른 사람들이 쓴다. 에덴복지재단에서 일하는 식구들은 여기에 와서 5일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하고 주말에 집에 간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에 에덴으로 온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일만 하고 사는 것이다”라며 “그래서 행복공장에서는 지금보다 2배 인원을 뽑아 2교대로 운영하려고 한다. 그래야 장애인들이 일에서 벗어나 여가생활을 좀 누릴 수 있다. 써보지도 못할 돈을 버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쉬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여행도 하면서 삶을 즐기게 해주고 싶다. 그게 진짜 복지다”라고 정 회장은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 회장에게 물었다. 여가가 생기면 뭘 가장 하고 싶냐고. 그는 세계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직 한번도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또 장애인이 되고 나서 45년 동안 한번도 혼자 있어본 적이 없다며 혼자 있어보고 싶다는 소원도 덧붙였다. 누군가 먹여줘야 식사를 할 수 있고, 5시간마다 누군가 기구를 통해 용변을 빼내주어야 생리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그의 삶을 잠깐이라도 헤아려 보면 참으로 비애 섞인 소망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삶이 있었기에 수많은 장애인들이 거기에 기대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정덕환 회장은 이 시대 장애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름드리 울창한 한 그루의 거목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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