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가 만들어낸 인간군상의 파란만장한 인생궤적

김근태와 이근안. 격동의 시대가 만들어낸 상반된 인간군상들이다. 한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바쳐 투쟁했고 다른 사람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민주화 인사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했다. 민주화 이후 두 사람의 행로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한 사람은 제도권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다른 사람은 옥고를 치른 뒤 성직자가 됐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구도로 설명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가 만든 두 사람의 인생궤적을 추적해 보았다.

민주주의의 대부 故 김근태

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전 상임고문이 2011년 12월30일 오전 5시31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향년 64세. 2012년 1월3일 명동성당에서는 고인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영결식이 열리던 날 삭풍은 유난히 매섭게 불어 닥쳤다. 시대에 온 몸으로 맞섰던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의 마지막 길은 그랬다. 
고인은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재학시절이던 1971년 교련반대시위, 대통령 부정선거파동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면서 수배와 투옥을 거듭하며 순탄치 않은 인생궤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이 나라 민주화의 궤적과 정확히 일치했다. 고인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민주화의 산 증인이었다. 

전두환 정권시절이었던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은 1985년 8월24일 이른바 ‘서울대 깃발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를 씌워 고인을 연행했다.
‘깃발 사건’이란 1984년 <깃발>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두 차례에 걸쳐 대학가에 뿌려져 공안당국이 발행자와 배포자에 대한 수사에 나건 일을 말한다. 사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만들어낸 작품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정권은 민추위 위원장이던 문용식과 문용식의 배후조종자로 김근태를 지목하고 총 26명을 국가보안법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고인은 1988년 10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깃발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고인은 9월4일부터 26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1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렇지만 고인은 굴하지 않았다. 고인은 모진 고문으로 심신이 거의 망가지다시피했으면서도 고문일시, 방법, 그리고 가해자를 기억해냈다. 그가 당한 고문의 실체는 1985년 12월19일 법정진술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본인은 9월4일부터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해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5일, 9월 6일 각 한 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 20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집단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됩니다. 고문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인은 자신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던 가해자의 실체를 세상에 알렸다. 1988년 한겨레신문 민권사회부 기자로 치안본부를 출입하던 문학진 기자(현 민주통합당 의원)와 접촉하면서 단서를 제공했고, 문 기자는 고인이 전해준 단서를 토대로 가해자를 추적한 결과 고문을 가한 장본인이 경기도경 공안실장 이근안 경감임을 밝혀냈다.
그가 민주주의의 대부로 추앙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이다. 고인 자신의 온 몸을 던져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로 인해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그렇지만 고인은 자신을 탄압한 정권의 만행을 고발했다. ‘걸레’로 비유될 정도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됐었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가해진 가혹행위의 모든 실체와 가혹행위자들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특히 고인은 1985년 12월19일 열린 첫 공판에서 ‘모두진술’을 수인의 권리로 요구해 법정에서 처음 사용했고, 12월29일엔 정석모 내무장관,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 검사 4명을 불법 감금과 가혹행위, 직무유기혐의로 고소했다.
자신이 겪은 치욕스러운 경험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희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국제사회도 고인의 열정에 감화돼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재단이 인권상을 수여했으며, 1988년 독일 함부르크 재단은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이었던 제도권활동

1992년 8월, 옥살이를 마친 고인은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제도권에 진입했다. 1995년 2월 민주당에 입당해 부총재로 선임됐고,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선임됐다. 1995년엔 사면복권됐고 1996년 4월11일 15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서울도봉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그 여세를 몰아 16, 17대 국회의원에 연거푸 당선됐다.
그러나 고인이 제도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과거 투쟁 전력을 무용담처럼 늘어 놓으며 기득권에 물들어 간 운동권 출신인사들과는 달랐다. 그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이었다.

고인은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범야권 인사도 중용하자고 주장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는 대선자금 양심고백을 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특히 고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노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이 포진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하자 고인은 앞장서서 이런 움직임을 막았다. 한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은 4월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때 열린우리당은 선거공약으로 아파트 분양언가 공개를 내걸었다. 그렇지만 노 전 대통령은 “시장경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러자 고인은 노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고 직격탄을 날리며 맞서기도 했다. 참여정부 2기 내각이 출범한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그는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한국판 뉴딜’이라는 이름아래 국민연금기금의 주식과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활용하겠다고 나서자 “하늘이 두 쪽 나도 국민연금을 지켜내겠다”고 선언해 정부와 대립관계를 이어갔다.

2012년을 점령하라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말년은 극적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지켜보며 생을 마감해야 했다. 200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그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총장 출신인 한나라당의 신지호 후보에게 1,200표 차이로 패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신지호 후보는 ‘도봉선진화’를 기치로 뉴타운을 핵심공약으로 내걸었고, 지역구민들은 신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신지호 후보의 당선은 뉴타운열풍을 등에 업고 이명박 후보가 대권을 거머쥔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고인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행동하는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올 양극화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2007년 3월27일 한미FTA가 또 다른 저성장과 양극화의 심화를 불러올 수 있다며 FTA협상중단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이는 반(反)신자유주의 투쟁의 연장선에 놓여있었다. 고인은 또 2008년 이명박 정부를 민간독재로 규정하고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09년 8월 신자유주의극복과 대안 모색을 위핸 스터디 그룹을 결성하고 타계하기 직전까지 열린 22차례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타계직전인 2011년 10월18일 자신이 운영하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는 글을 남겼다.
“월가점령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는 부도덕한 권력에 온몸으로 맞선 생을 보냈다. 2012년 1월3일 치러진 영결식에서 영결식장인 명동성당엔 ‘사랑으로’가 울려퍼졌다. 고인이 생전 이 곡을 좋아해서였다. 영결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랑으로’의 노랫말을 읊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으로’의 노랫말처럼 고인의 삶은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어둠을 밝힌 삶이었다. 그리고 ‘2012년을 점령하라’는 메시지는 고스란히 이 땅에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에서 신의 대언자로

지난 12월 30일 故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타계한 직후, 세간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로 쏠리고 있다. 고인이 온 몸을 던져 고발했던 ‘얼굴없는 고문기술자’, 바로 이근안 전 경기도경 공안실장이다.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가혹행위 고발 직후인 1988년 12월 이근안은 지명수배됐고 이후 10년 10개월에 걸친 도피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오랜 도피생활에 지친 탓일까? 이근안은 1999년 자수해 징역 7년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 2006년 11월 출소한 이근안은 신학과정을 밟아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때까지만해도 이근안은 자신의 죄과를 회개하고 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후 서서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건강악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새삼 이근안의 근황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근안이 2010년 2월 시사주간지인 <일요서울>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근안 ‘목사’는 <일요서울>과 가진 문제의 인터뷰에서 고문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호칭은 맞지 않고 굳이 부른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다고 본다. 범죄자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고 했다. 그는 한 발 더 나갔다. 자신의 행위가 애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사실 이근안이 고문행위를 부인한 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의 고문행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건 1988년 12월21일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그는 “85년 3월30일자로 치안본부에서 경기도경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김근태씨 사건수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 “79년 남민전사건과 81년 전노련사건 당시엔 연행돼 온 사건 관련자들을 감시하고 옆에서 심부름은 했으나 신문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당시 취재기자이던 한겨레신문 문학진 기자에게 해명했다.

출소 후에도 변명은 이어졌다. 2008년 2월 14일 국제외교안보포럼 조찬 강연회에 강연자로 나선 이근안은 20여 년 전 언론이 자신에 대해 보도한 내용들은 억측과 왜곡, 과장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강연 중에 그는 “친북반미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진보라는 좌파들과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넣어야 한다’고 하는 대통령, 친북반미 운동 경력이 유일한 훈장인 386 세대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직접 조사해 간첩 혐의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이 국가 기관에 의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 어디에도 과거 행각에 대한 뉘우침을 느끼는 대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잇달아 떠오른 ‘공안설교’

새삼 그의 거취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가 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성직자라는 점, 그리고 그의 행각이 고문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과 극명히 대비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가 목사안수를 받은 시점은 출소 후 2년이 지난 2008년 10월30일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시기는 수배 생활을 하던 1998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1년 6월18일 서울 관악구의 한 교회에서 열린 간증집회에서 “공소시효를 1년 남기고 성경 말씀에 따라 자수하게 됐다. 성경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근안에게 목사안수를 허락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그에 대한 목사임직을 놓고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달아 임직을 허락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근안이 이 전제를 어기고 ‘공안목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보다 근본적으로 지난 날의 죄과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2010년 12월16일 국제외교안보포럼에 강사로 나서 “현재 전교조 6만명으로도 파급효과가 엄청난데 급식노조가 만들어져 급식노조원 9만명을 더해 15만명이라는 힘을 얻게 되면 대한민국은 끝장난다”며 무상급식과 급식노조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교조가 학생들에게 북한을 찬양하는 교육을 하고 이를 간첩죄로 잡아들여도 재판과정에서 무죄로 풀려나더라”라며 “7명의 경찰관이 불타죽은 부산 동의대 사태의 주역들이 민주화 인사로 지정돼 보상받는 것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또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공안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라며 “대공분야, 간첩사건 수사는 속수무책의 지경”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근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은 복역 중인 그를 찾아가 면회했다. 가해자를 만난 피해자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은 그를 면회한 후 “사죄하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근안을 보며 차마 용서하지는 못했다.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혹시 내가 또 둘리는 것은 아닐까? 또 둘리면 과거에 당한 것의 곱배기로 당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한편 이근안은 2010년 2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주장까지 펼쳤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비밀 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만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 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냐

이근안의 최근 행적과 발언은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건강악화와 뒤이은 별세소식이 전해지면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과 행적을 종합해 볼 때 그가 절대자 앞에 ‘회개’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급기야 네티즌들은 그의 회개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과 그에 대한 목사안수가 적절치 않다는 주장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교회개혁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이하 한정협)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이하 한종련)는 성명을 내고 “자신이 했던 일은 애국으로 그 때로 돌아가도 또 다시 그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이근안을 보며 한국교회의 값싼 용서와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면서 “목사는 성경적 가치를 구현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선생인데 한국교회는 신학 과정만 이수하면 아무에게나 목사 안수를 준다”고 지적했다. 두 단체는 또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도 목사가 되고 나면 성자가 되는 것으로 치부되는 작금의 한국교회가 이근안이라는 기형적인 목사를 만들어냈다.”고 덧붙였다.

이근안 목사로서 적절치 않아

이 두 단체는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1월2일, 인터넷 포털 다음에 “이근안의 목사안수는 철회되어야 합니다”는 청원을 올렸다. 5,000명을 목표로 시작한 이 청원은 채 2주가 지나지 않아 목표를 채울만큼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근안의 목사안수 철회 서명운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근안이 목사안수를 받던 2008년 당시에도 청원이 올라왔고, 여기에 총 3,615명이 서명하는 등 반향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당시는 주로 이근안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했던데 비해 지금은 이근안에 대한 목사안수 철회를 교단측에 강도 높게 요구하는 한편,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남발하는 한국 교회의 관행에까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근안의 행적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기독교계 안에서 목사안수 철회 요구가 비등하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지난 1월6일 논평을 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 받는 인사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것은 성직제도 자체에 대한 왜곡이며, 단지 교단 확장 차원에서 인물에 대한 철저한 검증도 없이 안수를 준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서 이근안의 목사안수를 성직매매에 비유했다.

이근안, 끝내 목사직 잃어

파문이 커지자 이근안에게 임직을 허락했던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진화에 나섰다. 이 교단의 정서영 총회장은 1월10일 한 기독교 인터넷 매체를 통해 “목사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면서 목사안수 철회 불가입장을 취했다. 이근안의 목사안수는 교단 고유권한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정 총회장의 발언은 가뜩이나 곱지않던 여론을 격분시켰다. 이근안의 목사안수를 철회하라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급기야 그에게 고문을 당했던 유숙렬 전 합동통신 기자가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란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충격적인 과거를 증언했다.
교단으로서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이 교단의 교무처장 이도엽 목사는 “여러 교회에서 열린 간증집회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문은 예술이라는 등의 발언을 입에 담은 건 목사의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면서면서 “지난 14일 징계위원회를 소집해 그를 면직처리했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또 “이근안에게 목사직을 허락한데 사과한다. 악인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데, 그는 이를 망각했다”면서 “그가 좋은 일을 하려면 목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복직은 없다”고 못박았다.

교단이 응분의 조치를 취한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개운치않은 뒷맛을 남겼다. 한종련과 한정협은 1월19일 교단을 방문해 목사안수 철회요구서를 전달했다. 철회서엔 이근안 목사의 안수철회, 교단차원에서 이근안에게 고문 피해자에 대한 사죄 권고, 불합리한 목사 안수제도 철폐, 부실한 목사 안수에 대한 재발방지 천명과 공개사과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교단측의 면직조치 발표는 바로 그때 나왔다. 교단이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조용히 처리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살 수도 있는 행태였다.
이근안의 목사직 박탈조치가 이뤄졌음에도 그의 회개의 진정성, 그리고 목사임직의 적절성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그에게 물고문을 당했던 유숙렬은 기고문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근안씨, 남들이 당신을 목사직에서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 오십시요.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청소부가 되어서 묵묵하게 자신의 죄를 씻고 또 씻으십시오. 아니면 당신이 일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비원으로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사죄하십시오. 고문기술자였던 당신이 해야할 일은 ‘반공설교’가 아니라 진심어린 ‘사죄’이기 때문입니다.”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 그리고 이근안의 가혹행위로 인해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이 이근안에게, 그리고 이근안에게 목사직을 허락해준 교단에,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계 전체에 느끼는 바람도 바로 진심어린 ‘사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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