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전쟁과 5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135년의 프랑스 식민지배 막 내려

1956년 2월13일, 프랑스의 신임 총리 몰레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 알제리를 방문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알제리 국민들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수도 알제에서 몰레 총리의 차량을 막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알제리 국민들의 독립운동은 7년 여 동안 계속됐고 1962년 7월 드디어 독립을 이뤘다.

[1956년 2월13일] 알제리 독립 시위

알제리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나라로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82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1962년 물러나기까지 135년 동안 알제리를 식민통치했다. 프랑스는 1830년 처음 알제리를 침공한 이래,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나 현지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통적 부족 사회를 해체하고 주민들을 새로운 행정 단위로 몰아넣었는데, 이는 부족 소유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알제리 독립투쟁이 벌어진 것은 1930년대부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제리에서도 피어오르기 시작한 아랍 민족주의는 1945년 이후에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1945년 5월8일 2차 대전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알제리 독립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세티프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알제리인 1만여 명(알제리 측 추산으로는 4만 명이 넘는다)이 살해당했다. 이는 알제리 독립투쟁의 방향을 게릴라·테러 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4년 11월1일 자유민족전선(FLN)의 주도로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날 3,000여 민족해방군 전사들이 30곳이 넘는 프랑스 병영, 초소, 경찰서 등을 타격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당시 이들을 지지하는 사회당·공산당과 알제리가 계속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 정당들의 의견충돌을 빚고 있었다.

그리고 1956년 2월13일 프랑스의 신임 총리 몰레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 알제리를 방문,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알제리 국민들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수도 알제에서 몰레 총리의 차량을 막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는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잘 묘사하듯 수천 건의 도심 테러와 파업이 줄을 이었다. 1958년 은퇴했던 샤를 드골 장군이 알제리 사태를 해결하고 프랑스 정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계로 복귀했다. 드골은 알제리의 독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에비앙에서 FLN과 협상을 벌였다. 이후 알제리는 독립운동을 계속한 끝에 1962년 7월5일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 125만 명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본토로 향하는 동안 새로이 수립된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 측에 협력하거나 가담한 알제리 국민들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알제리는 8년의 전쟁, 5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 프랑스 당국의 고문과 강간으로 인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값비싼 대가로 치루면서 인류 전체를 위해 식민지배라는 역사의 막을 끌어내렸다.

[962년 2월2일] 신성로마제국 탄생

교황 요한 12세(Joannes, 재위 955~963)가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Otto, 재위 936~973)에게 황제의 제관을 씌워줌으로써 962년 2월2일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고대로마제국의 연장이라고 여겨 ‘로마제국’의 명칭을 쓰고 고대 로마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회와 하나라는 뜻에서 ‘신성’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15세기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으로 불렸다. 16세기 이후에는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o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오토 대제(오토 1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1세(Heinrich Ⅰ, 재위 919~936)를 비조로 정한 작센 왕조에서 시작되어 이후 잘리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대공위시대와 가권 경쟁 시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에 이르기까지 850여 년을 존속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좁게는 독일의 찬란한 역사였지만, 넓게는 중세와 근대에 걸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에 영향력을 끼친 명실 공히 유럽의 역사이기도 했다. 유럽의 역사에서 황제란 곧 신성로마제국(독일)의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Napoleon Ⅰ, 재위 1804~1815)가 친프랑스 성향의 라인동맹을 수립한 후 황제 프란츠 2세(Franz Ⅱ, 재위 1792~1806)가 퇴위하면서 건국 844년 만에 해체되었다.

[1929년 2월11일] 바티칸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이탈리아와 오랫동안 반목하고 대립해 온 로마 교황령(領)이 1929년 2월11일, ‘라테란 협정(Lateran Concordat)’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으로 탄생했다. 협정은 교황 비오 11세(Pius XI, 1857~1939)를 대신해 교황청 국무장관 가스파리(Gasparri, Pietro, 1852~1934) 추기경과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1883~1945)가 서명했다.
로마 교황령이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가 로마를 점령한 뒤 교황 비오 9세(Pius IX, 1792~1878)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으로 존속했으나, 영토 대부분은 1860년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59년 간의 갈등 해소에 나선 사람은 1922년에 로마로 진군, 이탈리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무솔리니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절실했던 무솔리니는 가톨릭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무솔리니는 가톨릭을 이탈리아 유일의 종교로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몰수한 교회재산도 돌려줬다. 교황도 이탈리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답함으로써 무신론자인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시내에 있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영토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독립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로 바티칸 시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의 정식 명칭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聖座, Sancta Sedes)이다.
 
[1959년 2월16일] 재일동포 북송반대 궐기대회

재일동포 북송은 북한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1959년 이후 재일본조선인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송환된 사업을 말한다. 재일교포 북송문제는 1955년 북한외상 남일의 재일교포 귀환 추진 발언과 1958년 9월8일 ‘재일교포의 귀국을 환영한다’라는 김일성의 성명을 계기로 표면화되었다. 이후 한국정부의 외교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9년 2월 일본각의에서 ‘재일조선인 중 북조선 귀환희망자의 취급에 관한 건’이 의결됐다. 그러자 2월16일,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규탄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국민 궐기대회와 거리행진이 이어졌다.

학교와 사회단체들이 주축이 된 이집회에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야 대립으로 공전되던 국회도 두 달 만에 개회해 재일동포 북송반대를 결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8월13일 북한적십자사(북적)와 일본적십자사(일적) 간에 캘커타 북송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재일교포 북송이 정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14일 975명의 제1진이 니가타항(新潟港)을 출발한 이후 1967년까지 약 8만 8,000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입국했고 북송선(北送船) ‘만경봉호’는 재일교포 북송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일 양측은 협정 연장에 합의, 계속 재일교포 북송을 추진했지만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이 알려지자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북송사업은 84년까지 계속됐으며 총 186차례에 걸쳐 9만 3,339명이 이주했다. 북송자는 재일동포가 대부분이었으나 일본인 처(妻)의 수도 적지 않았으며 직업별로는 공사장 인부, 일일고용자, 공원, 상공업종사자, 학생 등이 주로 차지했다.
당시 이 사건은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북송선 앞에서 집단적으로 북송반대 시위를 벌여 남북 간의 대결을 격화시켰다.

[1988년 2월17일] 남극세종과학기지 준공

남극세종과학기지는 남극 킹조지 섬에 건설된 한국 최초의 남극 과학기지이다. 세종기지는 서남극 남극반도에 평행하게 발달한 남쉐틀랜드 군도(South Shetland Islands)의 킹조지섬과 넬슨섬으로 둘러싸인 맥스웰만(Maxwell Bay) 연안에 있다. 방위각으로는 남위 62˚13', 서경 58˚47'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8년 2월17일 세계에서 16번째로 준공되었다. 킹조지 섬은 남극대륙이 아닌 사우스쉐틀랜드 제도에 있는 남극과 가까운 가장 큰 섬으로 남극 진입의 관문으로 불린다. 킹조지 섬은 남극대륙에 비해 접근하기 쉽고 비교적 기후조건이 좋다. 이곳에는 한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러시아, 칠레, 폴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중국, 페루, 미국, 독일, 체코 등 12개국의 13개 상주기지가 건설됐다. 이들 기지에 상주하는 연구원들은 연구 조사 도중 악천후를 만날 시 상대의 기지에 자유롭게 대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6년 33번째로 남극조약에 서명하며 남극 연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남극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연고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지를 준공했지만, 현재는 자원 개발보다 극지환경과 기후변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는 본관동, 연구동, 숙소를 갖춘 기지가 건설된 뒤 발전동, 창고, 체육관이 설치되는 등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2000년에는 중장비 보관동이 신축됐으며 2009년에는 생활관동과 발전동이 추가로 설치돼 기지에 상주하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기지가 있는 지역의 고층대기와 대기빙하를 연구할 수 있는 연구동도 추가로 설립돼 남극 지역의 대기 관측과 해양환경 연구와 동식물 표본에 대한 연구, 남극 지역의 기초생산력 등의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매년 정부부처, 연구기관, 대학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연구원들이 월동대원으로서 1년간 기지에 상주하며 지진파, 지구자기, 고층대기 그리고 성층권 오존 측정 등의 일상 관측을 수행하고 그 밖에 1월부터 약 2개월간 하계기간에는 40여 명의 연구원들이 세종기지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남극 탐사는 1978년 남극해 크릴 시험조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1988년에 1차 남극연구단이 세종기지를 방문해 해저 지형을 탐사하고 해양생물을 채취하는 등 조사 연구 활동을 벌였고, 연구 성과와 극지연구 능력을 인정받아 1989년 10월 세계에서 23번째로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O) 지위를 획득하며 극지 연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90년 7월에는 남극의 과학적 연구를 조정하는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의 정회원 자격도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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