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보좌관, 비서관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시대

몇 달 째 나라가 떠들썩하다. 지난해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끝없는 뉴스의 행렬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뉴스를 충실히 전달해야 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한없이 바쁘고 고단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라는 큰 행사가 있는지라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오는 뉴스의 크기와 강도와 평소와 크게 다르다. 특히 필자를 괴롭히는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폭로, 의혹, 논란, 비리들이다. 특히 현 정권의 실세를 중심으로 한 주변부의 비리의혹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어마어마하다. 한 사건의 실체에 채 접근해 보기도 전에 다음 사건을 만나야 할 지경이다.

정권 말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지만, 여야 모두가 사활을 건 정치혁신을 선언한 터라 쏟아져 나오는 의혹과 논란의 농도가 더욱 짙고 지독할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정치권이라는 울타리 안은 민의(民意)가 꿀과 젖처럼 흐르고, 화합과 번영을 위한 토론이 합창처럼 울려 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정치권은 살벌한 전쟁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나마도 본대를 사수하기 위한 소수정예의 선봉대(정치인)들 간의 포격전이 아니라, 오직 홀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백병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서글프게 느껴진다.

상대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폭로와 의혹제기가 난무하고, 마치 고지 쟁탈전처럼 폭로의 대상과 진영이 계속 바뀌고 있다. 필자는 지난 몇 년 간 이러한 전쟁에 여러 차례 참가한 바 있다. 다만 전투병이 아닌 종군기자 신분이었다는 게 다를 뿐이다.
붉은 피와 살점이 튀는 이 전쟁터를 오가며, 죽어가는 혹은 살아남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고, 취재수첩을 채워나가는 중이다. 장대비처럼 내리는 비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진흙탕 같은 폭로전 속에서 실체를 찾아내는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해 있었던 10.26재보선 이후 이어지고 있는 안개정국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이 살기 위해 총검을 휘두르는 전쟁터의 풍경은 그대로이지만, 지휘관은 없고 온통 병사들만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로 불리는 ‘선관위 디도스 사이버 테러사건’, 우리 정치권의 오랜 치부였던 ‘전당대회 돈 봉투사건’, 이젠 특별한 것도 없는 ‘권력형 수뢰사건’, 정치권 핵심 인사가 연루됐다는 혐의가 짙게 드러져 있는 ‘저축은행 비리사건’ 등 대형 포탄들이 곳곳에서 떨어지고 있는데, 피격 당해 쓰러지는 이들은 모두 병사들 뿐이라는 점이 이상하다.
디도스 사건은 20대 치기어린 젊은 수행비서가 그의 지인들과 벌인 하룻밤 사이의 불장난이었고, 돈 봉투 사건은 자신이 모시는 ‘어르신’과 ‘집안’의 번영을 위해 홀로 결행한 희생이었으며, 저축은행 비리사건은 피해자는 분명한데, 가해자가 불분명한 미제사건이라고 한다.

줄 세우기 좋아하고, 위계질서가 유독 엄격한 우리 사회, 특히 정치권에서 몸통과 날개 그리고 깃털이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음은 그 얼마나 자명한 사실인가. 그런데 이 치열한 난리통에 뽑혀 나오는 것은 온통 새하얀 깃털들뿐이니, 이를 어찌 풀이해 기록해야 할지 모르겠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여 깃털들만의 전쟁이라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깃털이야 어떠하든 몸통과 날개만 깨끗하고 올곧다면 무슨 상관이랴. 때 묻고 상한 깃털이야 뽑아내면 새로 자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리 위안을 해도 씁쓸한 마음은 끝내 감출 수가 없다. 60여 년의 민주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정치경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21세기의 이 땅에서 일개 보좌관과 비서관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빠뜨려 놓은 형국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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